날이
무딘 만능칼 가지고 중국 역사를 본다 에레혼 5.4운동은 밋밋하다. 중국 역사는 항상 풍파가 끊이질 않지만
5.4운동을 대혼란이라 부르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다. 1919년
전후 상황을 살펴보자. 1919년 이전 중국에는 아편전쟁, 태평천국운동과
같은 대혼란이 일어났다. 이후에 발생한 굵직한 사건들로는 반우파투쟁,
대약진, 문화대혁명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사건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했을 때 5.4운동은 거창하지 않은 것처럼 인식될 정도이다. 심지어 5.4운동은 이미 정전화된 근대사이기에, 면밀하게 분석할 내용조차 없는듯 보인다. 《중국 현대사를
만든 세가지 사건》에서는 5.4운동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중국 역사와 세계사의 다양한 맥락을 살피는 작업을
수행한다. 다각적 분석을 통해 저자는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애국 운동’이라는 5.4운동의 형식적 정의 이면을 드러낸다. 저자는 5.4운동은 단순히 구습타파에만 열을 올리는 집회 위주의 운동이 아니라, 신해혁명의
연속상에 놓인 중국 혁명사의 한 조각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20세기 초 중국의 지식인과 청년들은 신해혁명의
체제 전복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극복하고자 5.4운동과 같은 정신혁명에 열을 올렸다. 또한 세계사적 맥락에서 5.4운동은 대안적 문명을 중국에서 일궈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1차 대전이 보여준 폭력성과 민족자결주의로 대표되는 1세계 국가들의 무책임함은, 중국이 서방 중심의 세계질서가 본보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독특한
점은 이러한 공화의 위기와 문명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낸 주체가 학생이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학생들이 정치적 운동의 핵심 세력이 된 데에는, 정체성의 위기가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 정신적 혁명을 위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으나, 당시 중국의
현실은 청년 세대의 열망을 포용할 수 없었다. 당시 중국은 다수의 군벌이 영토를 나누어서 압제적 통치를
감행하는 혼란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당시 청년들은 1919년 이전에도 청원 운동과 같은 정치 참여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성과를 일궈낸 바 있다. 정치적 행동에 대한 승리의 기억은 중국 사회 전반에 소단체가 다수 설립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마오쩌둥 역시 1918년 창사에서 신민학회라는
조직을 설립하며 이러한 열풍에 동참한 인물 중 한명이었다.) 이처럼
5.4운동은 (비록 산발적인 형태였을지라도) 다양한
형태의 정치 참여가 기반이 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해당 사건은 베이징 청년만의 외침이 아닌, 중국 전체를 뒤흔든 정치운동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었다. 《중국 현대사를
만든 세가지 사건》 1부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5장과 6장이었다. 5장에서 저자는 5.4운동을
해석하는 다양한 시각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6장에서는 중국
대륙 바깥에서 5.4운동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소개한다. 이러한
패턴은 《중국 현대사를 만든 세가지 사건》의 컨셉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책에서는 근현대사의 사건들을
분석하고 마지막 두 장을 할애하여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동아시아적 맥락을 소개하는 서술을 반복한다. 개인적으로는 해당 저서의 가장 주요한 파트라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특히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중국 근현대사를 분석하는 작업은 중국사를 개별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에 비해 훨씬 다양한 인사이트를 제공할 수 있다. 예컨대 홍콩에서는 5.4운동의 문화적 파급력이 미미했다는 사실, 오히려 전통 숭상이 지배적 문화로 자리했다는 저자의 지적은 현재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홍콩에 대한 이미지에 배반한다. (첨단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홍콩, 정치적 순수성이 보존된 공간으로서의
홍콩) 이처럼 세계사적 동시성에 주목하는 일은 중국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물론 책 속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참신한 부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왜 저자가 ‘근대 극복과 근대 적응의
이중과제’라는 오래된 명제를 가지고 중국사를 분석하려 하는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중국 현대사를
만든 세가지 사건》 곳곳에서 저자는 중국 근현대사를 분석하기 위한 이론으로 백낙청의 이중과제론을 소환한다. “중국의 (흔히 반半식민성으로 지칭되는) 조건에서는 근대의 ‘부정적 특성’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근대적응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근대극복을 겸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한계가 있다.(1부 5장 1절)” “1920년대에
출현한 국민회의의 구상과 실천을 서구의 대의제가 아닌 새로운 민주주의의 모색이자 근대극복의 계기로서 저자가 각별히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1부 5장 2절)” “……식민지 근대의 ‘부정적 특성’을 일상생활에서 체감하며 근대극복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조선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는 긴장을 유지할 계기를 발견하면서 일국을 넘어 피압박민족들과 연대의 길을 열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1부 5장 3절)” 이중과제론은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 근현대사를 새롭게 분석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백낙청의 이중과제론은 근대의 양가적(이면서 본연적인) 성격에 이론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백낙청은 ‘분단체제
극복이 근대 적응의 노력과 근대 극복의 노력이 합치되었을 때만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며 한반도의 정치적 특수성을 언급하기 위해 해당 이론을 제시했다. 분단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이중과제론인데, 여기서 분단이라는 맥락을 소거한다면? 1부의 후반부로 가면 민의 결집과 자치의 경험을 논의하겠다는 저자의 의도는 희미해지고, 근대 적응과 근대 극복이라는 잣대만이 남는다. 백번 양보하여 저자의
학문적 지향점을 고려하자면, 근대극복과 근대적응이라는 프레임을 활용하는 일은 아시아의 동시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시도는 당연히, 그
어떤 역사적 사례를 대입하여도 유효한 분석 도구로 활약하게 된다. 어떤 아시아의 국가라도 근대로 명명되는
시점은 뼈아픈 과거이면서 긍정적 측면 역시 동시에 발견할 수 있는 때이다. 이처럼 모든 사례에 잘 들어맞는
이론이 신중국 수립이나 천안문 시위와 같은 사건에는 어떻게 활용될지, 삐딱한 태도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