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x 페미니즘]<SF는 어쩌다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 0125 발제
여성들의 놀이터, 탈출구로서의 장르문학
7장_여주인공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또는 여자는 왜 글을 쓸 수 없는가?
문학은 여자를 다루지 않았다. 문학은 여자와 남자를 동등하게 다루지 않았다. 문학을 하는 이는 남자였으며 문학이 다루는 이도 모두 남자였다. 여자는 평면적으로 대상화된 채 서사의 도구로만 등장했다. 나쁜 여자, 좋은 여자, 엄마같은 여자, 창녀같은 여자, 정숙한 여자, 문란한 여자, 아름다운 여자, 못생긴 여자, 끝. 변주도 물론 있다. 아름다운 악녀와 사악한 요부(어쨌든 잡년), 정숙한 아내, 강간당하는 이름 모를 처녀… 끝. 이들은 모두 주인공(물론 남자)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했다 사라진다. 모두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타자이다.
문학에서 여자 ‘주인공’이 담당하는 한 가지가 있다.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역할. 내재한 플롯은 동일하다. 사랑에 빠지고 구애하고 결혼하는, 또는 구애와 결혼에 실패하는 무수한 변주들이다. 여성 작가의 소설에서조차 여주인공은 연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또는 결혼하는 데, 이혼하는 데, 자신의 성생활을 걱정하는 데, 자신의 외간남자에, 자신의 연애 생활에 에너지와 시간의 대부분을 쏟는다. 주인공 여자는 맨날 남자를 얻고, 남자를 잃고, 남자를 돌보고, 남자를 위해 또는 남자와 함께 죽는다.
러브스토리가 아닌 소설을 썼을 때 여성작가들(ex. 버지니아 울프)은 ‘소설에 중요한 사건에 결여되어 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지나치게 감성적이다’, ‘사소하다’, ‘여성스럽다’ 등의 평가를 받았다. 남성 신화를 이용해 쓴 플롯(남성 소설가들의 형식, 극적 전개의 법칙)을 따르지 않았을 때 여성작가들(ex. 샬롯 브론테)은 ‘플롯도 없고, 종잡을 수도 없는’ 서사라고 비판받았고, 작가의 결함이나 모든 여성 작가의 결함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조애나 러스는 문화의 성별이 곧 남성이 되는 등식에서 벗어난 장르 즉, 탐정소설, 초자연적 소설, SF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SF는 인간의 신화에 광범위한 유형을 제공한다. 이 신화는 젠더 역할을 무시할 뿐 아니라 문화에 구속되지도 않는다. SF에 등장하는 가장 매혹적인 인물 중 몇몇은 아예 인간이 아니다. 여성작가는 전통적 젠더 역할에 짜맞춰진 플롯으로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 SF가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는 이유는 당연해진다.
8장 누군가 날 죽이려 하는데 그게 아무래도 내 남편인 것 같아 : 모던 고딕
중세 고딕식 건축물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초자연적이거나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다루는 고딕소설류가 1950~70년대 모던 고딕 장르로 확장됐다. 모던 고딕은 주로 음울한 저택과 사랑에 굶주린 젊고 외로운 고아 여주인공, 슈퍼메일, 다른 여자, 섀도메일, 불길한 대화, 비밀, 감정의 정리가 기본 요소다. 조애나 러스는 모던 고딕이 여성이 여성을 위해 쓴 장르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모던 고딕은 러브스토리가 아니고 성애와 관련되어 있지도 않다. 플롯의 절정에 등장하는 살인미수가 가장 중요하다. 딱히 소설의 형식이랄 것도 없다. 이상한 건 공포나 로맨스, 살인의 한복판에 살림에 대한 전문 지식들, 꼼꼼한 의상 묘사, 여성으로서의 다양한 에티켓, 실내 인테리어 묘사 등이 필요불가결한 요소처럼 등장한다는 것이다. ‘가정주부’라는 직업은 피해야 함과 동시에 이렇게 미화하고 그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는 직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애나 러스는 모던 고딕이 여성이 처한 전통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고 보고 여성성의 신화를 신봉하는 중산층들이 필요로 하는 탈출구로서의 독서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모던 고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음모, 범죄, 위험 같은 소재와 여주인공의 완벽한 수동성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음모와 정욕과 범죄의 중심에 놓인 젊은 여성. 여주인공들은 기껏해야 사랑, 선, 구원, 순수를 상징하는 데 그친다. 모던 고딕은 여성성의 신화를 반영하며 다수의 여성들이 영위하는 삶을 미화한다. 그러나 여주인공의 진짜 속마음을 독자들은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기왕 수동적이어야 한다면 최대한 이용하는 편이 낫다! 기왕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아주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보석 밀수나 살인같이 스릴넘치는 일에 나도 끼고 싶다! 등. 모던 고딕의 주독자층은 중산층 여성 또는 중산층이 되려는 열망을 지닌 여성이었다.
9장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
조애나 러스는 메리 셸리의 작품들이 “자기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특별하다는 순진한 확신에 빠져 글을 쓰는 짜증나는 소수 작가들의 작품”처럼 들쑥날쑥하게 읽히는 복잡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메리 셸리가 “자기 시대의 소설이 자신은 이용할 수 없는 형식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새로운 영역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메리 셸리는 현실 사회를 관찰하고 쓴 글임에도 줄곧 이상화된 모습으로 인물을 묘사했다.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같은 이야기 안에, 심지어 같은 가족 안에 공존했다. 메리 셸리는 우울한 가족환경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현실에서 고립되기를 택했으며, 지금 여기는 견딜 수 없기에 작품에서 현실을 이상화하고 자연에서 도피처를 찾은 것이다.
메리 셸리는 지금 여기를 피해 과거로 가는 길을, 또 한쪽으로는 미래로 가는 길을 택했고,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미래의 이야기였다. 현실은 살만한 곳이 아니거나 곧 망할 세계였다. SF에서 끈질기게 다루는 것이 세계의 종말이다. 많은 SF 작품들이 메리 셸리가 창조한 종말론적 사건들을 활용했다. SF에서 성공한 이야기들은 가장 뛰어난 작가들이 아니라 “괜찮지 않은” 작가들에게서 나왔다. 메리 셸리가 그랬듯이.
평론가 조지 버나드 쇼는 “새로운 걸작은 오직 기존의 걸작에 만족하지 않을 때 창조된다”고 했다. 새로운 형식은 기존의 형식에서 볼 때 언제나 낯선 것이다. 누가 새로운 형식을 시작했는지는 모를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유추가 가능해진다. 메리 셜리의 작품은 새로운 형식이 태동한 장소 중의 하나일 것이다.
조애나 러스는 메리 셸리가 좀 더 행복한 환경이었다면 무엇을 썼을지 짐작해 본다. 아마도 지금 여기, 현재를 다루는 셸리를 볼 수 있었으리라. 그랬다면 소설가로서는 더 뛰어났을지 모르나 신화 창조자로서는 덜 뛰어났을지도 모른다. 프랑켄슈타인도 열 일곱살 때 겪은 첫 아이의 죽음에서 탄생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지금 여기에서 살 방도를 찾아야 할 때 새로움이 창조됐다. 수려하지 못하고 들쑥날쑥한 형식이더라도 거기서 뭔가 태동했다. 수많은 메리 셸리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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