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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푸코] 담론과 진실 :: 0214 파레지아 발제2019-02-1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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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파레시아_ 1982년 그르노불 대학교 강의 :: 0214 발제


푸코는 이 강연에서 자신의 후기 사유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인 ‘파레시아’를 총체적으로 다룬다. 고대 그리스어인 ‘파레시아’는 아테네 시민의 정치적 권리이자 철학 담론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로, ‘진실을 말하는 용기’, ‘위험을 감수하며 말하기’, ‘비판적 태도’를 뜻한다. 파레시아란 푸코에게 있어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성찰을 위한 전략적 도구이자 역할이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의 문헌을 토대로 파레시아의 다양한 의미 변화를 추적하며 자신이 주장하는 자기 배려 내에서 파레시아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 


파레시아라는 개념은 어원적으로 ‘모두 말하기’를 의미한다.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의무는 스승, 인도자, 지도자, 말하자면 자기 돌봄을 위해 필요한 ‘타자’에게 적용되는 계율로서 나타난다. 사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조건에서만 자기를 배려할 수 있고, 자기를 돌볼 수 있으며, 에피멜레이아 헤아우투할 수 있는 것이다. 파레시아는 수사학적 맥락이나 정치적 사유 내에서의 용례도 발견된다. 그러나 푸코가 좀더 관심을 가진 것은 의식지도의 문제였다. 


파레시아는 고대 전반을 통해 정치적 윤리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었던 아첨과 대립되는, 역전된 아첨의 양상을 띄며, 형식적인 면에서 수사학의 규칙은 물론 철학적 논증의 규칙도 신경쓰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고 타인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형식으로 말하며, 바로 이것이 대화 속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특히 영혼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카이로스 즉 개입에 적절한 시기가 있어야 한다. 아첨에 반대되는 파레시아가 어떤 덕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카이로스의 기술로 쓰이는 파레시아는 어떤 테크닉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파레시아는 단순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테크닉은 아니다. 파레시아는 언제나 두 항을 갖는 작용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과 자기 자신을 배려하려는 자, 그래서 파레시아를 가진 타인, 즉 파레시아스트를 필요로 하는 자는 파레시아스트를 찾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자신 역시 파레시아스트가 자기에게 말하게 될 진실을 받아들일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받아들일 채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 듣는 능력, 경청할 능력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어떻게 아첨하는 파레시아스트와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를 식별할 것인가(플루타르코스)’의 문제. 첫째, 파레시아스트를 찾는 주체와 파레시아스트 자신 간의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둘째, 파레시아스트는 언제나 동일한 것들에 기뻐해야 하고 동일한 것들에 동의해야 한다. 호불호 체계, 판단 체계 내에서의 영속성이 필요하다. 셋째, 유일하고 동일한 파라데이그마(원형, 모델)를 향해 자신의 삶을 관리해야 한다. 즉 파레시아는 말하는 자 고유의 삶의 방식이 그가 하는 말 속에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드러나 어떤 모델로 현전하게 된 그런 상태를 의미한다.


파레시아를 구성하는 핵심, 스승의 파레시아가 있다. 사람들이 자기 영혼의 인도를 믿고 맡기는 스승, 그 어떤 수사학도 방해하지 못할 정도로 투명하게 자기가 사유한 바를 말하는 스승의 파레시아. 이것은 스승이 자기가 가진 의견이 무엇인지를 말한다거나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바를 말한다는 의미에서의 파레시아가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것, 즉 자신의 선택(판단)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는 의미에서의 파레시아이다. 이 스승의 파레시아에서 특징적인 것은 스승의 언표에 발화 주체가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을 이끄는 자가 자신이 말하는 진실에 자신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단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도 그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단언하기 위해 자신이 하는 말에 결부될 때, 두 대화 상대자 모두 솔직한 파레시아가 존재한다. 


파레시아의 형식들 중 하나인 영혼들의 상호적 열림이라는 주제가 세네카의 편지들을 관통하고 있고, 푸코는 그리스도교에서 전개된 유형의 파레시아 중 하나가 여기에서 발견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 내에서 파레시아는 자기가 말하는 것에 말하는 자가 명백히 결부되는 것인데, 이때 말하자는 자는 제자 쪽이다. 즉 불완전한 자, 죄를 범한 자, 향상과 진보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자, 바로 이런 자가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책임의 전도가 발생하여 파레시아 구조 내에서 균형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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