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종막》 3장 일본의 초기 팽창주의, 4장 유신 외교 이 책의 3장과 4장에서 저자 김기혁은 18세기 후반부터 메이지유신 초기까지 일본의 팽창정책과 조선에 대한 정책의 변화과정을 다룬다. 일본의 대륙 팽창정책은 역사가 아주 길고 1592년 임진전쟁은 그 정책이 가시화된 결과이다. 저자는 이 긴 팽창정책의 역사를 여러 단계로 나누고, 팽창정책과 관련된 일본 내 인물들의 이해관계와 주장을 세심하게 정리한다. 팽창정책은 유구했지만, 내부의 사정은 단순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점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장 훨씬 이전부터 일본인들에게 조선이 내부의 정치 상황을 타개할 ‘만병통치약’으로 이해되어왔다는 점이다. 물론 메이지 이전과 이후의 상황이 다르고, 막부파와 천황파가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대립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서양의 침입과 문호를 개방하는 문제는 일본에도 골칫거리였으며, 쓰시마의 경우처럼 각 번의 경제 상황과 이해관계도 중요했다. 그렇게 문제가 복잡할수록 만병통치약의 존재감은 더욱 부각되었다. 만병통치약을 언젠가 복용한다는 점은 분명했지만, 언제 어떻게 얼마나 복용할지의 문제에 있어서는 나름의 차이가 존재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정책을 유지하면서 조선을 이용해 서양의 침입에 대항하려 했지만, 조선 원정은 국내 위협을 회피하려는 수단으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개혁파는 서양을 통해 세계질서를 새롭게 접했으며, 일본이 조선을 넘어 대륙으로 진출하지 못하면 독립국으로 남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팽창을 주장했다. 1850년대 후반과 1860년대 초반 조선은 일본의 대외정책에서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서양의 위협을 강하게 느낀 일본은 서양의 우월성 또한 인정하기 시작했고, 대륙 팽창을 중요한 정책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조선 정복을 위한 명분이 하나 더 추가된 셈이었다. 쓰시마 번주와 가쓰 야스요시를 중심으로 정복보다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경제적 이득을 얻자는 주장이 등장하여, 히라야마를 중심으로 한 사절단이 꾸려지기도 했다. 저자는 지배력을 잃어가던 막부의 조선 정책이 적대적이거나 팽창주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막부는 존속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만큼 허약해져 있었다. 동시에 막부가 충분히 안정된다면 언제든 대륙 팽창주의는 부활할 수 있었다. 서양 열강과 조선의 충돌 중재를 명분으로 내세웠던 히라야마 사절단은 일본이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서양 열강과 대등한 위치임을 보여주려한 첫 번째 사례이기도 했다.(148쪽)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쇼군이 천황의 전권을 대리했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일본 황실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허약했지만, 유신을 계기로 일본은 동아시아 내에서 국제관계를 새롭게 재편하려 했다. 조선과 청 모두 천황을 내세우며 새로운 관계를 주장하는 일본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을 우회하면서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청을 공략하기로 했다. 청과 일본이 대등한 관계를 맺는다면 조선이 수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러시아와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서양 열강에 대항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모순되는 지점이 있었다. 서양 열강의 위력과 식민지배라는 세계질서를 이해하게 된 일본의 선택은 분명히 전통과 단절된 근대적 태도였다. 반면에 동아시아 안에서 임나부설처럼 과거부터 유래했다는 주장으로 종주권을 내세우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전통적 세계관 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였다.
1871년 청과 일본이 맺은 수호조약은 양국이 처한 모순적 입장을 잘 보여주는 조약이었다. 양국은 이전까지 서양 열강들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으며 외교에서 굴욕적인 자세를 보여왔다. 이제 세계질서와 국제법을 받아들인 두 나라는 서로 적극적인 자세에서 협상하며 나름대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고 최초로 ‘평등한’ 조약을 체결했다. 이 ‘근대적’인 조약의 이면에 도사린 문제는 바로 조선에 대한 지배라는 양국의 ‘전통적’ 문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