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H₂O인가?》 1장 물과 화학혁명 1.2 플로지스톤이 살아남았어야 하는 이유 이 책의 1장은 물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화학혁명을 다룬다. 저자는 화학혁명이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 매끈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라부아지에라는 이름과 ‘산소’라는 명칭에 익숙하다. 반면에 프리스틀리나 ‘플로지스톤’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다. 화학혁명은 라부아지에로 대표되는 산소주의와 프리스틀리로 대표되는 플로지스톤주의가 충돌하는 장이었다. 그 장은 좁고 예리한 절단면과는 달랐다. 우리는 화학혁명 이후의 세계를 산다. 프리스틀리나 플로지스톤이라는 이름은 패배의 이미지로 역사에 흐릿하게 기억될 뿐이다. 토마스 쿤이 지적했듯이 과학은 다른 학문영역보다 패배의 역사를 더욱 빨리 지워버린다. 실패한 이론은 ‘과학이 진리를 추구한다’는 신념에 균열을 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과학이 실은 무수한 오류의 역사로 이루어졌음을 잊어버리고, 그 실패나 오류가 우리 세계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이 책의 저자 장하석이 주목하는 플로지스톤주의 역시 이미 오래전에 오류로 판명된 이론이다. 라부아지에가 이끈 화학혁명의 성공은 이론의 정합성과는 별개로 그의 이론을 사실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믿게 된다. 프리스틀리는 틀렸고, 라부아지에는 옳았다고. 정말 그럴까?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프리스틀리의 플로지스톤주의와 라부아지에의 산소주의는 대등하게 경합했고, 나름의 논리를 갖춘 이론들이다. 두 이론 중 어떤 이론이 맞는가, 하는 질문에 저자는 몹시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토마스 쿤은 각각의 패러다임으로 작용하는 이론들이 중요한 문제들을 서로 다르게 본다고 지적했다. 문제 자체가 다르고 문제를 보는 초점이 다르니 어느 이론이 옳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두 이론이 남긴 실적을 평가한다고 해도, 양쪽 모두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인정한 문제들에 몰두했기에 평가가 쉽지 않다. 또한 실적에 대한 평가 역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두 이론을 비교하면서 저자는 토마스 쿤이 제시한 ‘패러다임’ 이론을 대체로 따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쿤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패러다임이 지닌 ‘독점성’에 반감과 회의를 느낀 저자는 패러다임 대신 ‘시스템-유형’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 나아가 플로지스톤주의와 산소주의를 각각 다른 시스템이라고 보고 두 시스템을 비교한다. 두 시스템은 여러 인식적 가치의 측면에서 어긋나는 모습을 보인다. 산소주의가 인식적으로 단순성에 집중한다면, 플로지스톤주의는 완전성에 사로잡혔다.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이 인식적 보수주의 경향과 함께 다원주의적 태도를 보였다면, 산소주의자들은 교조주의와 절대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저자는 특히 프리스틀리를 비롯한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이 보였던 다원주의적 태도를 존중한다. 산소주의자들이 플로지스톤 이론을 매장하려 했다면,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은 교조주의에 저항하려 했다. 화학혁명이 고전적 혁명의 좋은 예라고 각인된 이유로 ‘돌발성, 짧은 지속 기간, 빠른 속도’가 꼽힌다. 과연 화학혁명은 이렇게 신속하게 진행되었을까? 저자는 화학혁명의 결과가 확고해진 후에도 라부아지에에 반대하는 여러 유형의 과학자들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완고한 거부자들과 형세를 관망하는 자들, 라부아지에의 이론이 벌써 생명을 다했다고 여기는 자들이었다. 개종은 전면적이지 않았으며, 부분적이거나 미적지근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저자가 화학혁명의 중요한 요인으로 꼽는 지점은 무게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관심이다. 물론 무게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오늘날 오류로 판명되었지만, 이 무게에 관한 관심이 ‘합성주의’라는 새로운 전통을 화학 안에서 불러일으켰다. 산소주의가 합성주의 성격을 띤다면, 플로지스톤주의는 요소주의 경향이었다. 합성주의가 모든 물질을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고 본다면, 요소주의는 요소들과 기타 물질 사이에 존재론적 비대칭을 전제한다. 물질의 ‘분해-재합성’에 집중하는 합성주의는 점점 부상했으며, 연금술처럼 물질의 변환에 집중하는 요소주의는 점차 몰락해갔다. 물론 이 엇갈린 운명이 곧 한쪽 경향의 논리적 정당성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합성주의와 요소주의는 모두 각자 경험적 증거를 내세우며 경합했다. 이 경험적 증거는 각자가 내세운 전제에 따를 때만 가능하고, 그 전제 자체는 경험적 증거에 의해 검증되지 않는다. 무게가 중요하다는 주장 역시 합성주의를 수용할 때만 타당하다. 무게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관심은 부르주아지라는 그의 계급과도 부합한다. 비록 라부아지에는 세금 문제로 성난 군중에 처형되지만, 부르주아지의 승리로 끝난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은 합성주의와 결합한다. 합성주의의 부상은 합성주의 성격을 띤 산소주의의 승리로 연결된다. 이렇게 화학혁명의 전면에는 라부아지에의 이름이 남게 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혁명의 다양한 단면들과 맥락은 잊히고 축소된다고 주장한다. 플로지스톤의 이른 상실은 플로지스톤주의자들에게만 슬픈 일이 아니다. 우리는 플로지스톤 시스템을 통해 이미 도출된 지식이나 어쩌면 도출되었을 지식을 잃어버렸고, 다른 시스템이 플로지스톤 시스템과 상호작용하여 나타났을 가능성도 잃어버렸다. 플로지스톤을 ‘에너지’ 혹은 ‘전자’로 이해하는 관점들이나 광전효과에 대한 이해가 여기에 해당한다. 플로지스톤을 그렇게 일찍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이런 관점이나 이해를 더 일찍 만났을 수도 있다.
특히 이 책의 저자는 경합하던 두 시스템의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산소주의와 플로지스톤주의는 적대한 듯 보이지만, 라부아지에의 산소 이론들은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의 실험과 이론을 바탕으로 가능했다. 두 시스템은 서로 경합하면서 서로에게 자극과 영향을 주었다. 시스템은 패러다임처럼 독점적 체계가 아니다. 잃어버린 지식도 얼마든지 새로운 지식과 연결될 수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지식을 상상하는 힘을 가진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