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리터러시] 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1208
이 글의 독자는 누구입니까
그의 말이 무슨 뜻인가 판단해 보기 위해서는 말의 내용만 봐서는 안 된다. 그의 사회적 위치와 함께 살펴봐야 한다. 혹은 그가 사회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위치가 무엇인지 알면 더 파악이 잘 될수도 있다.
정치인의 말이 특히 그렇다. 학자라고 다를까 싶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저서라고 해서 다를까 싶지만 비슷하다. 더구나 어떤 대상을 독자로 상정하고 책을 쓰느냐를 보면 드러나는 게 많아진다. 애매모호한 문장으로 (너희들(=독자)은 알 수 없는) 고매한 세계를 묘사하는 듯한 글이 있는가 하면, 일반인들은 알기 어려운 전문 용어들로 지식을 과시하는 글들도 많다. 이런 글에서 드러나는 것은 (저자의) 고매한 세계도, (저자의) 깊고 깊은 지식의 세계도 아닌 저자의 욕망이다.
이번 챕터는 ‘물의 철학자들’이라는 주제 아래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가 물을 무엇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지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철학과 ‘물’을 연결하여 정리하는 일은 무의미할 것 같다. 그것이 맞다고 해도, 맞지 않다고 해도 오히려 이들 철학자들의 논지를 왜곡될 게 분명하고, 이현령비현령인지라 물처럼 텍스트가 스며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위에서 말했듯 ‘독자가 누구인가’ 하는 부분이다.
말단 관료였다던 공자가, 그보다 조금 높은 관료였다던 맹자가 쓴 글에서는 임금과 관료들의 도덕적 당위의 철학을 물과 식물이 대표하는 자연의 순리와 연결시켰다. 왕조와 임금, 군자의 도리가 중심인 텍스트에서 백성의 위치는 언제나 말단이고, 백성의 상태는 언제나 무지에 가까웠다. 임금을 숭배하고자 하는 관료들에게 바치는 조직윤리에 관한 저서라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겠으나, 그 텍스트 안에 등장하는 백성이 이 글을 보았다면(글을 읽지 못했겠으나) 하등 쓸모없는 텍스트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노자는 좀 달랐다고 한다.
노자는 유가와는 달리 상반되는 입장에서, [맹자]와는 다른 독자와 목적을 위해 쓰여졌다. 맹자는 자신이 보조하여 천하를 통합할 수 있는 통치자를 찾길 원했다. 그는 왕천하(王天下)할 수 있는 왕을 위해 저술하였다. [노자]는 정치적 혼란기에 생존을 원하는 작은 국가의 통치자나 개인들을 위해 쓰여졌다. 노자는 “하늘은 어질지 않다”며 우주는 도덕적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유가의 사상을 거부했다. “성인들을 제거하고 현인들을 없애면 백성들은 백 배 이롭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당시에도 천하를 위험한 상태로 이끌었던 가치 개념들이었다.(200~210p)
그러나 노자가 맹자와 다른 목적을 가진 글을 썼다고는 하나 천하를 위험한 상태로 이끌었을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여성의 속성이기도 한 물의 성질을 성인들이 생존하기 위한 모델로 택했다”는 부분에서는 시대적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장자는 [노자]와는 또 다르다. [장자]의 가르침을 따랐던 성인은 관료적 생활을 아예 거부한다. [장자]에 따르면 개인은 단지 무수한 생물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도는 과정이며 계속해서 지나간다. 무에서 유를 구별하려고 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만약 도가 물 즉 분화되지 않은 유동체와 같다면 이를 구별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망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저것이고 저것은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이 그렇다.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것은 그렇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그렇지 않다. 진실로 이것과 다른 것인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 차이는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다.(213~214p)
[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이 글의 저자는 1945년에 태어나 고고학, 갑골문 등의 연구를 통해 동양언어와 문화 사상을 공부한 서양 학자이다. 그는 누구를 향해서 이 글을 썼을까. 어떤 정보와 통찰을 주려고 했던 것일까. 동양 철학보다는 서양 철학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법이 익숙한 우리들로서는 저자의 의도가 지금은(2020년 12월의 아포칼립스) 그다지 신선해 보이지 않는다. 동양 철학은 대안이 아니다. “중국에도 이런 게 있었다”의 방식도, “중국에는 이런 게 없었다”의 방식도 더 이상 역발상이 아니다.
번역의 맹점이 명확히 드러나는 부분도 있었다. 서양 학자들은 동양을 너무 신비하게 해석할 필요도 없고, 동양 학자들은 서양을 너무 천박하게 해석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번역과 해석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에서 이해의 범위를 좀 넓혀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장자의 마지막 인용구가 유의미할 것 같다. 그것은 그렇다, 그들의 관점에서. 이것은 우리에게 옳다, 우리의 관점에서. 차이는 우리 자신이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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