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스피노자의 뇌] 1장 느낌 속으로 2019-04-23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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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느낌 속으로

‘느낌’ 속으로

고통과 쾌락, 그 사이의 온갖 느낌(feeling)은 우리 마음의 토대를 이룬다. 사물과 사건의 심상,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와 문장의 이미지가 느낌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느낌은 항상 우리 곁에 있지만 느낌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약이나 음료, 온천, 육체적·정신적운동으로 느낌을 치유하고 있지만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뇌가 어떻게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지 연구한다. 시각을 비롯한 감각 지각 과정을 연구하고 어떻게 사고가 통합되는 지 알아낼 수 있었다. 뇌가 어떻게 특정 개념을 배우고 기억하는지, 사물과 사건에 정서적 반응을 연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느낌은 개인적이며 접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연구할 수 없었다.


의식과 마찬가지로 느낌은 과학의 경계 저편에 있었다. 그러나 환자들의 신경학적 증상은 다마지오가 과학적으로 연구하게 만들었다. 뇌손상으로 연민이나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상황에서 그러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환자)도 기쁨과 슬픔, 공포와 같은 감정은 느낄 수 있었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다마지오는 세 가지 가설을 제기한다.
첫째, 손상된 뇌 부위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의 느낌이 억제될 수 있다.
둘째, 각각의 느낌은 서로 다른 뇌 시스템의 통제를 받는다.
셋째, 환자가 어떤 정서를 표현하는 능력을 상실하면, 그에 해당하는 느낌을 경험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그렇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특정 느낌을 경험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환자들도 그에 해당하는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
즉, 느낌과 정서는 쌍둥이이지만 정서가 먼저 태어나고 느낌이 뒤따라 태어난다. 느낌은 영원히 정서의 뒤를 쫓는다. 뇌 스캐닝에서 보면 사고(思考)로 인해 정서 상태가 촉발되고 이어서 느낌이 생겨나는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이 다마지오의 목적이다.


느낌에 대한 다마지오의 견해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은 우리가 어떤 상태인지 표현해준다. 느낌은 단순히 정서에 덧붙은 장식물이 아니다. 생명체 내부의 생명 상태(건강하고 편안한지 아니면 곤란하고 괴로운 상태인지)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왜소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드러내 주는 것이다.


느낌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문제인 심신 문제(mind-body problem)에 대한 견해를 확립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 어떻게 사고가 정서를 유발하고, 신체에 속하는 정서가 다시 사고의 영역에 속한 느낌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몸과 마음이라는 구분되는 형태로 발현되는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정서와 느낌의 신경생물학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 원리와 정책을 만들어 내는데 핵심적 요소가 될 수 있다.

헤이그 – (스피노자에게 관심을 갖게된 이유)

스피노자는 충동(drive), 동기(motivation), 정서, 느낌-스피노자가 통틀어 감정(affect)이라 부른 것-을 인간성의 중심으로 보았다. 인간의 존재를 이해하고 인간의 삶을 좀 더 개선하는 방법을 제안하려고 한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은 두드러진 개념이었다.


스피노자는 사랑이란 다름 아니라 외부의 원인에 대한 관념(idea)에 동반하는 즐거운 상태, 기쁨일 뿐이다라고 말했닫. 느낌이라는 절차를 정서의 원인이 되는 대상의 관념을 떠올리는 절차와 명확하게 구분했다. 기쁨과 기쁨을 일으키는 대상은 별개라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은 그 느낌을 일으키는 대상과 함께 마음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들은 몸 안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는 작업이다. 즉 살아 있는 생물은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느낌의 패턴이 이 반응을 따르고 쾌락과 통증 및 변이체들이 느낌의 필수요소라는 것이다.

또한 감정(affect)의 힘은 매우 강력하여 해로운 감정-비합리적인 정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긍정적인 감정, 즉 이성이 촉발한 감정이 필요하다. 감정은 “오직 그보다 더 강력한 상반된 감정으로만 억제되거나 중화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생각의 핵심은 순수한 이성 자체가 아니라 이성으로 유도된 정서가 동반될 때 열정을 억누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쉽지는 않다. 스피노자는 쉬운것에 별 가치를 두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마음과 몸이 동일한 실체의 평행하는 속성들이라는 개념이다. 마음과 몸을 다른 실체의 바탕에 놓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이 몸의 관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마음과 몸이라는 형태로 표현되는 자연적 메커니즘 뒤에 있는 원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한 것 같다고 다마지오는 말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생물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 필연적 노력은 생물의 현실적 본질을 구성한다. 자신의 생명 현상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기능을  ‘보다 완전한 상태’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한다.(코나투스). 그 상태가 기쁨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으로 선과 악, 자유와 구원 같은 개념을 감정이나 생명의 조절등과 연결한다. 사회적·개인적 행위를 통치하는 기준은 인간성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주장한다. 이 인간성은 우리 안의 신 또는 자연과 접촉하고 있다.

철학의 가치 중의 하나는 철학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철학이 과학을 예시해 왔다는 점이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과학은 철학의 역사적 노력을 알아보고 인정하는데 이바지 해왔다.


스피노자를 찾아서
스피노자는 인간 존재와 자연의 관계에 대해 집중했다. 이 관계를 밝혀냄으로써 인간 구원에 대한 현실적 수단을 제시하려고 했다. 수단의 일부는 개인적인 것으로서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통제이다. 한편 사회적·정치적 기구가 개인에게 제공할 수 있는 특정 형태에 도움을 요구한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말하게 하라.”고 스피노자는 말했다. 스피노자의 이런 혁명적인 노력은 동시대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의견이었다. 그래서인지 스피노자는 caute라는 단어를 편지에 자주 사용했다. 조심하라. 말과 글에 신중하라고.


스피노자의 신은 어느 곳에나 있고, 말을 걸지도 않고 기도에 응답하지도 않으며, 우주의 모든 입자 하나하나에 존재하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존재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유대교의 신도 그리스도교의 신도 아니었다. 스피노자도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모든 곳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두뇌는 하늘보다 넓어서 한 사람의 훌륭한 지능을 담고 거기에 보태 온 세상을 담을 수 있다는 에밀리 디킨슨의 말처럼 스피노자는 작은 공간에서도 무한히 자유로운 세상으로 내달렸을 것이다.

※행동신경학(Behavioral Neurology)이란 신경과의 한 세부 전공으로 인간의 고등한 뇌 기능, 예컨대 언어, 계산, 추리, 사고, 감정 등을 이루어 내는 뇌의 작용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번역자는 emotion과 feeling, affect는 정서, 느낌, 감정으로 정했다. 다마지오가 정의하는 emotion의 개념은 ‘신체 수준에서 일어나는 현상 내지는 변화’이다. feeling은 emotion(정서)과 달리 라틴어 어근의 합성어 아니고 동사의 명사형이라는 점에서 느낌과 잘 맞는다. 느낌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정서 또는 관련 현상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나는 통증이나 쾌락의 경험을 의미한다. emotion과 feeling을 동시에 아우르는 affect를 ‘감정’이라고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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