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희망: 과학기술학의 참모습에 관한 에세이》 4장 제조에서 실재로, 5장 사물의 역사성 넷플릭스 유명 애니메이션 《러브 데스+로봇》 시리즈 중에 요거트가 주인공인 에피소드가 있다. 한 실험실에서 태어난 요거트가 지능을 얻어 인간들과 협상을 한다는 설정이다. 사실 주인공은 요거트 자체가 아니라 요거트 안에 사는 미생물이다. 파스퇴르와 효모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책의 4장과 5장을 읽으며, 그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발효를 가능하게 하는 미생물 효모는 스스로 변화하고, 발효를 통해 주위 다른 물질을 변형시킨다. 브뤼노 라투르는 ‘파스퇴르가 효모를 발견했다’고 쉽게 말하지 않는다. ‘구성’했다거나 ‘제조’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런 표현은 모두 라투르가 보기에 허점이 지나치게 많은 표현이다. ‘구성’과 ‘제조’는 주체와 객체 간의 이분법에서 주체의 역할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파스퇴르가 효모를 ‘구성’하고 ‘제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위하는 주체가 된다면, 효모는 그 행위의 생산물인 객체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그럼 효모가 생산물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라투르가 말하는 효모는 발효라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실험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파스퇴르의 실험실에서 행위하는 주체는 파스퇴르만이 아니었다. 파스퇴르와 효모 모두 적극적으로 행위한다. 한쪽의 활동이 활발해진다고 해서 다른 쪽의 활동이 위축되지 않는다. 효모의 활동이 활발해져야만 파스퇴르의 연구도 그만큼 성공적이 된다. 파스퇴르의 연구 활동은 효모의 발효 활동과 함께 확장된다. 실험실에 파스퇴르와 효모만 존재할까? 아니다. 우리는 지난 장에서 라투르에게 과학을 사회로부터 분리하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다. 과학은 가능한 많은 관계의 연결과 순환을 통해 풍부해진다. 정신과 세계, 주체와 객체, 존재론과 인식론을 가르는 방식으로 우리는 절대 실재를 포착할 수 없다. 이제 효모라는 존재자를 알기 위해서는 과학을 둘러싼 관계들, 파스퇴르와 동료들을 포함한 과학 커뮤니티와 세계 전체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효모는 주인공이면서 가장 소외되기 쉬운 존재이다. 비인간이기 때문이다. 비인간이기 이전에 효모는 파스퇴르의 실험실에서 새로운 존재자로 규정되기 전까지 비존재에 가까웠다. 많은 이들이 효모의 존재를 부정했다. 이 새로운 존재자의 출현을 설명하고 과학 커뮤니티에 소개하는 역할을 맡게 된 파스퇴르의 방식은 무척 세심하다. 효모가 부정당하지 않도록 파스퇴르는 상식과 비상식에 모두 호소한다. 파스퇴르는 자신의 실험 결과가 얼마든지 비상식적일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효모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세계에서 진술의 정확성은 언제나 의심받는다. 파스퇴르는 자기 진술의 정확성보다 발효라는 결과로 나타나는 효모의 행위에 주목해달라고 요청한다. 이 주목과 판단에 대한 요청은 다시 상식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효모라는 비존재가 분류와 함께 존재자의 영역에 기입된다. 라투르는 이 실험실에서 단지 파스퇴르와 효모가 만났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파스퇴르가 알아보기 전부터 효모가 존재해왔다는 설명도 마찬가지다. 비존재에서 존재로, 분류되지 않는 존재에서 분류된 존재가 되면서 효모는 변화했다. 파스퇴르도 마찬가지다. 효모가 변화한 만큼 파스퇴르도 변화했다. 실험의 성공으로 새로운 효모와 새로운 파스퇴르가 만들어졌다. 실험은 요소들을 조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교환하고 증폭하면서 변형된다. 이제 파스퇴르의 실험은 더 넓은 세계와 관계 맺는다. 과학 커뮤니티와 세계는 새로운 존재자와 그 존재자의 행위를 받아들이며 변형된다. 파스퇴르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속한 우리 역시 모종의 지식체계 속에서 훈육된 관성(선입견)대로 세계를 바라본다. 효모처럼 새로운 존재는 우리의 관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관성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고 라투르가 말한다는 점이다. 효모처럼 변형되고 새로 기입된 존재자는 우리 관성에 변형을 가하며 등장한다. 이 존재자는 그 자체로 존재론을 발전시킬 뿐 아니라 인식론의 충돌도 불러온다. 아무 관계도 없는 두 가지 인식론이 포개지면서 역설이 발생한다. 파스퇴르의 실험실은 무언가가 발견되었다기보다 이런 모순이 연출되고 해결된 장소였다. 존재론적 질문과 인식론적 질문을 분리하려는 경향은 이런 모순 앞에서 무력하다. 말하는 주체인 인간과 객체이자 침묵하는 세계의 구분을 벗어나야 한다. 이 구분 속에서 우리는 역사를 인간 주체의 소유물로 바라본다. 인간에게 인간의 역사가 있듯, 비인간 효모에게도 역사가 있다. 인간-비인간은 반대되는 힘을 겨루는 구성요소가 아니다. 주체-객체 이분법으로 세계를 말하면, 두 구성요소는 동등하지 않으며 객체는 변화하거나 활동 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세계를 객체로 바라보는 시선에는 고정성에 대한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이 발제문의 도입부에서 내가 말한 애니메이션 속 인간들은 요거트(미생물)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믿거나 행위하지는 않는다. 인간들이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점을 간파한 요거트는 인간들과 함께 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지구를 떠난다. 인간보다 뛰어난 지성체 요거트가 떠난 지구의 운명은? 암담하다. 세계를 객체로 고정하고 탁월하지도 않은 자신들을 주체로 가정하는 인간들의 앞날이 어찌 밝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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