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연옥편 제12곡 ~ 제22곡 벌써 연옥의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단테의 이름만 듣고 낯선 지옥 여행에 따라나섰다. 유명한 작가의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늘 예상과는 다르다. 단테의 이 책 역시 그렇다. 신을 찬양하는 이야기만 쏟아낼 줄 알았던 단테는 의외로 정치 이야기에 몰두하고, 판타지에 재능을 드러낸다. 무르익는 여정과 함께 이야기꾼의 기술도 늘어가는 단테를 만나며 고개를 끄덕인다. 오래 읽히는 작품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 이 발제에서는 《신곡》을 읽기 전 내 예상과 달랐던 몇 가지 점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지옥과 연옥의 차이이다. 지옥이 형벌과 고통 그 자체에 집중하는 공간이었다면, 연옥은 고행에서 참회로 이어지는 여정을 다룬다. 벌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공간의 분위기와 벌을 받는 이들의 태도가 무척 다르다. 지옥의 죄인들은 수백 년 이상 벌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지만, 연옥의 죄인들은 죄를 뉘우치며 어서 천국으로 가기를 바란다. 지옥과 연옥의 가장 큰 차이는 천국으로 갈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이다. 천국행이 봉쇄된 이들에게 참회는 개나 줄 일이다. 생전에 저지른 흉포한 일들을 지옥에서도 여전히 저지른다. 함께 벌 받는 동료들끼리 서로 때리고 욕하는 일도 흔하다. 친절과 고상함이라고는 찾기 힘들었던 지옥에서 단테는 자기가 살던 피렌체를 떠올린다. 지옥에 있는 죄인은 곧 참회와 먼 이들이기에 그들을 때리고 모욕하면서도 단테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지옥과 연옥의 다른 차이로 육체의 유무를 들 수 있겠다. 지옥의 죄인들이 육신을 가지고 있어 신체의 고통에 시달린다면, 연옥의 영혼들은 육체가 없다. 육체가 없다고 고통이 없을까? 지옥의 죄인들은 영원히 반복되는 육체의 고통으로 괴롭지만, 죄책감이나 뉘우침은 거의 없다. 반면에 연옥의 영혼들은 죄를 뉘우치느라 가벼운 고통에도 울먹인다. 천국이 지척인데 들어가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연옥에서는 뉘우침 자체가 곧 형벌이다. 연옥의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하고 자상하다. 형벌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기도를 부탁하는 이들을 모욕하기란 쉽지 않다. 단테 역시 연옥에 적응할수록 친절하고 겸손해진다. 지옥의 죄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지 않았던 단테는 연옥의 죄인들, 특히 교만한 죄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동질감과 함께 두려움을 느낀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이라는 애매한 공간이 필요했던 이유가 차츰 이해된다. 연옥은 매우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공간이다. 지옥이 지구의 땅속에 있는 공간이라면, 연옥은 지구상 남반구 대륙의 산 위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천국에 가기 위해 육체 없는 영혼들이 고행하는 공간이지만, 단테는 연옥을 절대 관념적인 공간으로 구성하지 않았다. 연옥의 영혼들은 육체가 없지만, 살아있는 단테처럼 보고 듣고 떨림을 감지하는 육체적 감각을 통해서 참회하면서 연옥을 받아들인다. 그림이나 조각, 외치는 소리의 형태로 죄의 내용이 소개되면, 단테 역시 보거나 듣는 행위를 통해 한 가지씩 죄를 뉘우친다. 연옥의 문지기가 단테의 이마에 새긴 일곱 개의 P가 하나씩 그 뉘우침을 통해 사라진다. 글자가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단테는 빛과 함께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또 새로운 죄에 대해 알게 될 때는 몸이 무거워지거나 피로해짐을 느낀다. 죄에 가까워지는 일과 참회하는 일 역시 신체의 감각을 통해 드러난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단테가 신을 찬양하면서도 교회와 세속의 권력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단테는 연옥에 있는 인물 마르코의 입을 빌어 세계가 타락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 이유는 교황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이었다. 단테는 교황의 탐욕과 부패가 곧 그를 따르는 이들까지도 탐욕과 부패에 빠지게 했다고 말한다. 단테는 법과 정의로 통치하는 왕의 이미지를 내세우면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한다.
중세 말기의 시대적 혼란과 정치적 망명이라는 개인적 고통 속에서 단테의 이야기는 복잡하게 이어진다. 이야기는 이제 어디로 가게 될까? 애초에 단테의 지옥 안내자로 동행을 시작했던 베르길리우스는 연옥까지 함께 오게 되면서 어쩌면 천국까지도 함께 가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단테가 여정을 마치면 베르길리우스는 지옥의 림보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 꿈과 환상을 활용하며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한 단테의 작가적 상상력에 점점 빠져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