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에프 에스프리》 1. 과학소설이란 무엇인가? 2. 기술적으로 포화한 사회의 문학 3. 인지적 소외 셰릴 빈트는 SF, 과학소설을 정의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여러 번 강조한다. 장르는 언제나 흥행이나 비평을 염두에 두고 재구성된다. 장르를 어떤 식으로 정의하던 흥행이나 비평의 의도와 무관할 수 없다. 어떤 의도는 배제되고, 어떤 의도는 부각된다. 배제되거나 부각된 의도를 두루 살펴보려 할수록 SF라는 장르는 혼란스러운 개념이 된다. 동등하지만 상반된 의도들 속에서 우리는 SF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SF라는 장르를 구성하고 개념화한 몇몇 인물이 있다. 먼저 휴고 건스백을 빼놓을 수 없다. 건스백은 SF라는 명칭이 대중화되도록 전문 잡지를 활용했으며, ‘과학기술 시대에 적합한 문학 형식을 창조’하려 애썼다. (11쪽) 폴 앨콘은 최초의 SF로 자주 거론되는 메리 셸리의 작품에서 SF의 정의를 끌어낸다. ‘상상력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는 신화를 창조하기 위해 과학을 서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앨콘이 말한 SF의 정의이다. (12쪽) 《프랑켄슈타인》은 SF뿐 아니라 고딕 소설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데이비드 나이는 여기서 고딕 소설과 SF의 차이를 발견한다. 고딕 소설이 자연의 숭고와 관계된다면, SF는 기술적인 숭고와 관련된다. ‘기술적인 숭고’란 ‘평범한 인간의 상상력을 압도하는 대상을 만들어 내는 기술자나 전문가의 뛰어난 상상력으로 가능해진 숭고함’이다. (13쪽) 과학기술에 대한 찬양과 두려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SF에서 게리 울프는 새로운 문화적 임무를 발견한다. (14쪽) 존 리이더는 장르의 ‘형식적이고 심미적인 범주뿐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범주’를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17쪽) 그러나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SF 역시 경계가 모호하며 참여자도 이질적이다. 또 장르의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SF는 ‘생산적인 긴장과 모순된 가능성’을 제공하는 복수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17쪽) 리이더는 작가와 독자를 넘어선 SF 실천공동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셰릴 빈트는 리이더의 말대로 다양한 SF 실천공동체에 주목하고자 한다. 먼저 SF가 어떤 사회에서 나타났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저 럭허스트는 SF를 ‘기술적으로 포화한 사회의 문학’으로 정의한다. (33쪽) 럭허스트는 SF가 사회의 문화적·지적 변화와 관련이 깊다고 보았다. 이렇게 볼 때 SF는 문학뿐 아니라 ‘문화와 시장의 변화, 해석학의 체계로서 과학과 종교 사이의 계급변화, 일상생활과 일의 새로운 패턴’ 모두에 관계된다. (34쪽) 19세기 과학과 기술의 변화는 지적인 변화로 이어지고, 소설은 새로운 사고방식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 사고방식은 새로운 세계와 맺는 관계를 반영한다. 과학은 기독교에서 보장하는 인류의 우월함에 의문을 제기한다. 외계인의 존재는 인류 중심의 우주관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과학이 종교의 역할을 대체하게 된 시대에 우리는 과학을 통해 가능해진 변화와 과학이 무시하는 세계의 일부분을 SF를 통해 성찰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SF 인쇄물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미국에서 팬 공동체가 주축이었다면, 유럽에서는 학술적 연구가 중심이 되었다. 다른 움직임은 SF를 다르게 이해하도록 했다. 다코 수빈은 SF를 ‘경험적 세계와의 급진적인 불연속성을 전제로 한 문학’이라고 정의한다. 수빈은 ‘경험적 현실이 아닌 역사적 잠재력’을 SF 정의의 기준으로 삼는다. (66쪽) 수빈에게 SF는 ‘인지적 소외의 문학’이다. ‘인지’와 ‘소외’는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인 동시에 그 세계를 창의적이고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변증법적 도구이다. 텍스트와 세계 사이에서 차이의 촉매제로 작용하는 도구는 ‘노붐’이다. (67쪽) 수빈에게 SF는 노붐이 지배하는 ‘사회비평의 도구’이다. (68쪽) 수빈이 말하는 SF의 힘은, 평범한 세계가 이상하게 보이고 이상한 세계가 평범하게 보이는 현상을 넘어 현실을 반영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데 있다. 셰릴 빈트는 영화 두 편을 예로 들면서 ‘노붐’과 ‘인지적 소외’를 설명한다. 《디스트릭트 9》과 《아바타》가 그 영화들이다. 《디스트릭트 9》에는 수빈이 말하는 ‘역사적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드러나며, 《아바타》에는 ‘경험적 현실에 대한 실망’이 드러난다. (69쪽) 《디스트릭트 9》의 외계인은 노붐의 역할을 다하며, 우리에게 인간과 외계인의 관계는 물론 인간들 사이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도록 요구한다. 반면에 《아바타》는 비판적 성찰보다 도피성 환상의 신비화를 불러일으킨다. 수빈이 말하는 인지적 소외에 실패하면서도, 《아바타》는 관객에게 또 다른 정서적 변화를 일으킨다. 셰릴 빈트는 여기서 인지적 소외가 과연 다른 소외의 방식보다 우월한가를 묻는다. 칼 프리드먼은 수빈의 정의를 재구성하면서 ‘인지 효과’를 다르게 바라보려고 한다. 프리드먼에게 인지 효과는 사실성이 아닌 태도의 문제이며, 마법도 얼마든지 과학이 될 수 있다. (83쪽) 과학이 ‘카리스마적 권위’를 통해 텍스트에 힘을 부여한다면, SF는 과학적 합리성의 패권에 굴복하게 된다. 몇몇 SF 이론가들이 배제하고 부정하고자 했던 판타지는, 과학의 패권에 저항하고 혁명을 촉진하는 힘으로 다시 돌아온다. SF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빈이 강조했던 ‘인지적 소외’에서 중요한 점은 인지가 아닌 소외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SF는 자주 ‘타자성’이라는 근본적인 소외를 주목한다.
프리드먼은 ‘비평 이론과 과학소설의 결합은 우연적인 게 아니라 본질적’이라고 주장한다. (85쪽) 프리드먼에게 과학소설의 세계는 차이(차이가 만들어내는 차이)에 주목하는 세계이다. (86쪽) 한편 차이와 타자성에 주목하는 SF에 대한 정의는 문학과 세계의 관계를 어느 정도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인간이 세계를 창조하고 변화시키며, SF는 그 창조와 변화의 수단이다. 과연 주체로의 전환은 소외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게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