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푸코와 성] <일탈> 서문 발제2019-07-0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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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게일루빈 선집 일탈 서론 발제œ.hwp (31KB)

개인의 역사와 섹스, 젠더, 정치

 

《일탈: 게일 루빈 선집》 서론: 섹스, 젠더, 정치

 

게일 루빈(이하 게일)의 연구는 그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페미니즘이나 동성애 연구는 그 자체로 게일의 삶을 형성해온 중요한 주제들이다. ‘게일 루빈’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위해, 이제 우리는 그 텍스트의 공간과 시간을 짐작하고 파헤쳐야 한다. 친절하게도 게일 자신이 이해를 도울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게일 자신이 살아온 주변환경과 사회적 맥락들에 대한 정보까지.

 

게일은 자신의 삶을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눈다. 시골인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보낸 1960년대까지의 성장기, 그 후 1970년대까지 앤 아버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교육 받은 시기,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샌프란시스코에 반정착한 시기이다. 게일은 인종차별이 심한 남부 시골에서 자랐다. 인종우월주의는 정치와 종교 문제로도 확장되었다. 신교도가 공립학교를 포함한 모든 공적공간의 기본설정으로 인식되는 곳에서 가톨릭과 유대교 아동은 신교도의 기도문 암송을 강제 당했다. 강제는 저항을 불러왔고, 수동적인 저항들이 일종의 전술로 계발되었다.

 

푸코의 표현으로는 이런 저항들을 ‘대항품행’이라 부를 수 있을 텐데, 유대교 가정에서 자란 게일은 이런 저항들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게일 역시 종교적 강제에 저항했고, 놀이를 금지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금지하는 처벌은 훈육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푸코의 지적대로, 권력의 효율성은 생산성과 역동성에서 나온다. 권력은 무엇을 금지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하도록 만드는 형태로 행사된다.

 

게일이 자란 시골은 농촌의 강한 생명력과 해안가 특유의 자유로움 역시 가지고 있었다. 해변은 ‘평상시의 적절한 규칙들이 중지되는, 통제하기 힘든 행동이 벌어지는 임계공간’이었다. 이에 비해 마을은 ‘촘촘한 그물망’의 다정한 관계들 안에서 보수적 젠더 수행을 통해 유지되고 있었다. 어릴 적 살던 마을을 묘사하는 게일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안에 젠더와 성애,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의 씨앗이 조용히 뿌려지는 게 느껴진다. 이 씨앗들은 미시간대학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게일은 미시간대학의 앤 아버 캠퍼스에서 페미니즘을 접하게 된다. 전 세계적 흐름 속에서 자신이 전공한 인류학을 페미니즘과 접목하기 시작한다. 게일은 젠더를 섹스(몸)와 분리하는 문제에 집중했으며, 젠더를 통한 여성의 종속이 그 자체로 문화의 생산물이라고 본다.

 

1971년 봄 앤 아버에 게이 해방운동이 출현했고, 레즈비언 방문가를 만난 날 게일은 바로 커밍아웃을 했다. 레즈비언, 동성애, 게이와 같은 명명을 통해 ‘자신의 경험과 정서적 역사를 재해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일의 관심사는 이때부터 레즈비어니즘으로 옮겨갔고, 이론보다 현장 중심의 연구를 하게 되었다. 변화의 방향은 ‘젠더에서 섹슈얼리티 쪽으로, 페미니즘에서 게이 레즈비언 연구로, 레즈비언 연구에서 게이 남성 연구로’ 향했다.

 

1970년대 후반 게이 대이동에 합류하여 서부 샌프란시스코로 옮겨간 게일은 ‘게이 도시 정치의 궤도’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1978년 푸코의 《성의 역사》가 번역되었고, 이후 게일의 현장 중심 연구에서 푸코의 이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특히 게일은 ‘섹슈얼리티 장치’가 ‘혼인 장치’를 토대로 보완하면서 구성되었다는 푸코의 견해에 주목했다. 게일은 혼인 장치와 섹슈얼리티 장치의 구분에서 전통사회와 근대사회를 구분할 단서를 발견한다. 이후 게일의 연구들은 게이 역사 아카이브를 만들고 자료를 발굴·축적하는 데에 집중되었다. 게일은 스스로도 문서보관소라는 공간을 좋아한다고 밝히고 있다. 푸코는 글을 쓰는 행위가 거대한 지식보관소에서 무언가를 탈취해오는 행위라고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쓴 글은 다시 문서보관소로 되돌아가서, 다른 누군가에게 탈취된다. 게일은 성실하게 그 작업을 수행했다. 푸코가 말했듯, 그 작업이 누구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연구를 수행할수록 게일은 경험적인 연구와 그런 연구를 잘 수행하기 위한 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특정 장소에서 특수한 집단의 세부적인 것들을 직접 참여하여 연구하는 일은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했다. 그렇게 수집된 데이터들이 문헌들을 진부하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게일의 연구들은 점점 더 현장성을 띠었고, 예기치 못한 변수들로 인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게이 공동체 형성에 관한 연구가 도시 재개발 문제와 맞물려, 부동산 규제에 관한 회의에 참석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게일은 성이 도시의 정치·경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실감했다.

 

1978년 HIV와 에이즈로 인해 게일의 연구는 위협받고, 초점이 변화하게 되었다. 에이즈의 충격이 낙인과 공포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성 공황 패러다임은 성에 대한 과민반응으로 연결되었다. 1970년대 후반 부상한 신보수인 ‘뉴라이트’는 섹스와 젠더를 사회·정치적 의제로 부활시켰다. 성교육 대신 순결이 권장되고, 낙태가 범죄화 되며, 포르노그래피와 대립하고, 동성애자를 불완전하게 보는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페미니스트들이 동성애자들과 대립하거나,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의제가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의 의제로 수렴되는 일들도 벌어졌다. 게일은 이 시기에 반포르노그래피 페미니즘 운동을 분석하고, 이 운동이 반인신매매 운동의 반매춘화 진영으로 이동하는 과정에도 주목했다. 페미니즘과 트랜스섹슈얼 간의 갈등은 이런 대립들보다도 앞서 일어났다. 학계의 변화한 지형 속에서, 게일은 정신분석학이 동성애 탈출 선전의 도구로 이용되는 현상까지 목격한다.

 

남성 간 성행위 처벌에 이용되던 소도미법이 2003년 연방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는 등 고무적인 변화가 없지는 않았으나, 게이 권리운동의 최전선은 자꾸만 축소되었다. 탈범죄화와 탈병리화 요구가 어느새 결혼과 군 복무 허용에 대한 요구로 바뀌었다. 게일은 동성애 공포가 정치적 전술로 이용되는 상황을 강하게 우려한다. 성은 정치에 비해 주변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듯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섹스, 젠더, 낙인, 공포는 여전히 두드러지고 있어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성을 의식해야 하고, 또 타인의 성을 의식한다. 인간을 분류하는 제1관문은 언제나 성이고, 누군가는 늘 성의 문제로 원하지 않는 취급을 받는다. 그 누군가에게 성은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이며, 삶의 모든 문제가 집약된 부분일 수 있다. 그러니 게일은 섹스와 젠더에 대한 낙인의 공포에 맞서 이 책의 서문을 이렇게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장차 언젠가는 섹스가 정말로 주변적인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편으로는 궁금해진다. 정말로 우리가 서로의 성에 대해 묻지 않고, 개의치 않는 시대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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