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zziraci/621
맥베스는 악인이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비극과 비교할 때 이 점이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다른 비극과 달리 주인공을 파괴하는 상대가 없다. 예를 들어 햄릿에게는 클라우디우스가 있고, 오셀로에게는 이아고가 있다. 이들은 주요 인물의 삶을 망쳐놓는 존재다. 그러나 <맥베스>에서는 이런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점은 <리어왕>에서 예견된 점이다. <리어왕>에서 악인 에드먼드는 기묘하게도 리어왕과 접점이 없다. 에드먼드는 자기 목적을 성취해나가는 인물이다. 적자인 자신의 배다른 형제를 모함하고, 나라를 양분하여 소유한 리어왕의 두 딸을 꾀고... 그의 목적이 성공하였다면 에드먼드는 왕이 되었을 테다. 이제 <맥베스>에서는 제 목적과 욕망을 충실히 실행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맥베스>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햄릿>이 악인 클라우디우스의 문제와 부딪히는 작품이었고, <오셀로>가 악인에 의해 파괴되는 삶을 보여주었다면, <리어왕>은 악인 에드먼드의 이야기를 한 축에 놓고 리어와 그 딸들의 이야기를 한 축에 놓았다. 그러나 <맥베스>는 악인이다. 악의 문제를 극의 중심이 되는 주인공에게 부여했다. 결국 이는 <맥베스>를 악인의 몰락으로 읽게 만든다. 맥베스가 자신의 탐욕에 휘둘려 왕 덩컨과 친구 뱅쿠오, 나아가 맥더프의 가족까지 죽이지만 결국 그 탐욕에 발목이 잡혀 죽는다는 이야기. 지나친 욕망은 결국 몰락하고 만다는 이야기로 읽기 쉽다.
하여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을 괴롭히는 환영은 양심으로 읽히곤 한다. 맥베스는 양심 때문에 핏빛 손을 씻었으면서도 뱅쿠오의 유령을 보고, 맥베스 부인은 몽유병에 시달린다. 잠을 자지 못하는,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은 죄악의 괴롭힘 때문이리라.
이렇게 읽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무언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것은 비극이 결국 윤리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충분한가 하는 질문 때문이다. 악이 몰락하고 정의가 승리한다는 이야기를 위해, 탐욕을 몰아내고 양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비극이 필요할까? 교훈이 목적이라면 이 목적을 충실히 수행하는 이야기는 비극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이야기가 넘쳐나는데도 셰익스피어는 왜 비극을 썼으며, 우리는 왜 비극을 읽는 것일까?
'환영'이라고 하자.
맥베스는 마녀들의 예언을 듣고 왕이 될 욕망을 품는다. 관객은 이를 통해 두 사실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마녀의 예언은 성취될 것이며, 맥베스는 그 결과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따라서 극 속의 맥베스에게 마녀는 기묘하게 마음을 빼앗는 존재이지만 관객에게도 그럴지는 의문이다. 관객에게 <맥베스>는 하나의 연극일 뿐이며, 마녀 역시 연극 속의 모호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점은 현대극에 익숙한 근대인의 시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근대인은 워낙 이야기에 단련되어 웬만한 이야기가 아니면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손에 땀을 쥐듯 고전을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녀 역시 마찬가지. 그보다 더 마음을 빼앗는 인물이 얼마나 많은가. 시선과 마음을 빼앗고자 한다면 오늘날 연출이 훨씬 큰 역할을 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맥베스의 모습이다. 마녀에게 예언을 듣고, 환영에 시달리는 그를 통해 관객은 무엇인가를 보게 된다. 맥베스를 사로잡는 단검의 환영, 뱅쿠오의 유령이 실제로 극에 등장하더라도 관객은 허상에 흔들리는 맥베스에 주목하게 된다. 맥베스 부인은 어떤가. 맥베스 부인을 괴롭히는 무엇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움직이는 숲은 어떤가. <맥베스>를 읽으며 거대하게 움직이는 숲을 상상하게 된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커다란 것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다. 무시하고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그 존재를 떼어낼 수 없다.
이야기의 매력은 내가 주인공이었으면 하는 바람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행복한 왕자와 공주를 꿈꾼다. 내가 그였으면 하는 선망이 이야기를 읽는 힘이다. 그러나 비극은 그렇지 않다. 내가 그였으면 하는 바람은 사라지고 구경꾼의 위치에 서게 된다. 나는 그가 아니며, 내가 그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거리감을 낳는다. 그래, 비극은 남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잘 쓰인 비극 역시 그럴까. 남의 이야기라면 사실 눈여겨볼 필요가 없다. 남의 이야기라면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다. 설사 보고 듣는다 하더라도 흘려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관객을 극장에 가두어 놓고 장엄한 비극을 눈앞에 들이민다. 결국 그 이야기를 마치고 난 뒤에는 내가 그일까 하는 물음이 남는다. 하나의 환영을 심어주는 것이다.
비극에 대하여 가졌던 그 거리감이 사라졌을 때 관객은 극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처럼 시달리고 괴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을 테다. 다만 질문은 그 거리감, 나는 그가 아니며, 내가 그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무너뜨린다. <맥베스>는 맥베스만의 이야기인가? 그가 환영에 시달리는 것은 그만의 문제인가. 탐욕에 살인을 저지르고 뒤늦게 손을 씻는 것은 맥베스 만의 어리석은 참회일까. 뱅쿠오의 유령을 보고도 공포와 분노를 뒤섞여 내뱉는 것이 맥베스만의 광기일까.
생각해보면 운명이란 영웅에게만 주어지는 특혜는 아니다. 누구나 인생의 순간에서 거부할 수 없는 유혹과 대항할 수 없는 배척을 받는다. 이루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면서도 왜 삶은 그리로 치닫는 걸까. 확신과 믿음, 확고한 전망보다는 환영에 시달리는 까닭이다. 인생이란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이고, 소음과 광기가 가득한데도 의미는 전혀 없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결국 비극이란 그리 멀지 않는 데 있구나.
내일과 또 내일과, 내일과 또 내일이 이렇게 쩨쩨한 걸음으로, 하루, 하루, 기록된 시간의 최후까지 기어가고 우리 모든 지난날은 죽음 향한 바보들의 흙 되는 길 밝혀 줬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이고 잠시 동안 무대에서 활개치고 안달하다 더 이상 소식 없는 불쌍한 배우이며 소음, 광기 가득한데 의미는 전혀 없는 백치의 이야기다.
5막 5장 (12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