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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따라가기 버겁다. <잔향의 중국철학>은 정보를 전달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 - 게다가 이 해석은 많은 물음으로 이어져 있다 - 을 소개하는 책이라 더욱 그렇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언어와 정치'라는 주제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의 정치란 이론보다 훨씬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라 이 주제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게으름일까. 말들이 먹먹하게 씹힌다. 갑자기 도진 이명 때문일까.
그래도 하나를 건진다면 바로 '욕망'이라는 것. '철학'에 국한하여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욕망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철학과 욕망을 선뜻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겠지만, 고대의 중국철학자들을 '성인'으로 표상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성인에게 욕망을 투사하는 것은 무리 아닐까.
어떻게 하면 타자를 말소할 수 있을까. 이것이 언어의 말소 아래에서 욕망하고 있던 숨겨진 물음이다.(73쪽)
왕필의 노자 해석에 대한 탁월한 입구라 생각한다. 텍스트의 화자(저자), 혹은 주석가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정치란 권력의 기술이며 권력이란 욕망의 집약적 방향이라 할 때, 욕망을 빼놓고 이 질문에 답할 수는 없다. <노자>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도가道家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단순히 '무지무욕無知無欲'이라는 말을 끌어들여 거기에는 욕망이란 없다고 말하는 순진하고 게으른 해석은 온당치 않다. 여기에 멈추면 '노장철학의 대가'를 '삼고초려'한 대선주자의 행보, 이에 응하여 정치판에 뛰어든 이를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라(去彼取此)'는 노자의 잠언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힌다. 이것을 버리라는 과욕寡慾의 잠언으로 읽을 수도, 저것을 취하라는 욕망慾望의 비전으로도 읽을 수 있다. 문제는 무엇이 은폐되는가 하는 점이다.
(도가는) 그들에게 권력을 지속적으로 휘두르려고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법에 의한 통치와 아무런 차이도 없다. ... 최대의 문제는, 도가의 성인이 결코 저항할 수 없는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 점이다. ... 언어와 권력을 거부하고 사람들을 계몽되지 않은 '무지무욕'의 상태로 놓아둠으로써 부동의를 해소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성인이 휘두르는, 즉 언어와 권력을 해소하는 권력은 유지된다. 더구나 이 권력에는 저항할 수 없다. 저항해야 할 권력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데, 그것은 저항하는 수단인 언어를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 종말을 늦추며 지속적으로 계몽함으로써 권력을 휘두르는 유가나 묵가에 비해 도가는 종말을 선취하고 계몽의 종언을 부르짖음으로써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다.(104-105쪽)
저자는 도가가 언어를 빼앗는 방법으로 영구적 권력을 취득한다 말한다. 도가가 꿈꾸는 성인은 계몽하지 않되 도전받지도 않는다. 그는 책임지지 않되 무한의 권력을 영위한다. 하여 문득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문사文士들 가운데 노자의 말을 극히 배척했던 것은, 자신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정치의 영역을 소거해버리는 것이기 때문 아닐까. 문사들에게 언어란 계몽의 도구인 동시에, 저항의 도구였다. 그 많은 격문과 상소를 빼앗길 수는 없지 않나. 문사는 언어를 통해 정치를 수행하는, 통치와 투쟁의 기능을 하는 존재였다. 말을 빼앗긴다는 것은 동시에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어를 빼앗긴 문사는 그저 피통치자-민民이거나 통치기관-리吏에 불과할 것이다. 법가가 발견한 기계적인 권력, 이는 후자의 특징을 극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유가-묵가-도가-법가 그리고 순자로 이어지는 흐름을 통해 결국 언어는 지배의 도구로 전환된다. 아마도 이것이 중국철학에서 저항, 투쟁, 전복의 가능성을 읽기 힘든 이유가 아닐까. 어쨌든 고대 철학자들의 탐구는 성공적이었다. 서구의 충격이 없었다면 과연 이 지배의 구조는 파괴될 수 있었을까. 루쉰의 말처럼 커다란 채찍이 등을 후려치지 않는 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테다. 아니, 어쩌면 루쉰의 시대에서 100년이 다시 지난 지금, 채찍질에도 바뀌지 않는 낡은 망령을 마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유세遊說의 시끄러운 소리 속에 얼마나 많은 타자, 소수자의 목소리가 묻혔는가. 왜 하나의 이름이 늘 웅성거림을 잡아먹는가.
저자는 포칵이 인용한 오든의 "1968년 8월"이라는 시 한 구절을 인용한다. "사람 잡아먹는 귀신이라도 말은 지배할 수 없다."(115쪽) 68로 상징되는 하나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인 동시에 중국철학에서 잔향殘響, 어떤 울림을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과연 웅성거림은 가능한가? 어디서 그것을 찾아야 할까.
<장자>는 '의意(뜻)-->언言(말)-->서書(책, 글)'이라는 순서로 가치가 떨어진다 말한다. 글은 찌꺼기이다. 글은 흔적에 불과하다. 이를 저자는 문장어에 대한 공포라고 말한다. 뜻은 언제 어떻게 온전히 전해지는가? 말과 글이 아니라면.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눈앞에 있지 않아도(현전하지 않아도), 부재하더라도, 죽었다고 해도 기능하는 문장어(글말)에 대한 두려움이며, 또 동시에 그것에 의해 훼손되는 일이 없는 완전한 현전, 완전한 삶에 대한 욕구다. ... 언어가 항상 '죽음의 언어'라고도 한다면, 그 위협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는 언어를 말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음의 언어'가 활동하지 않도록 언어를 망각함으로써 '언어의 죽음'을 초래한다고 하는 아이디어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84쪽)
말은 뜻을 죽인다. 따라서 언어는 '죽음의 언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언어의 죽음'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이 언어의 말살, 즉 침묵의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은 문장어에 대한 공포에 대해 '구어의 소리'에 대한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제물론>을 여는 웅성거림, 바람에 흘려 빚어지는 다양한 소리에 주목하자. 장자는 이 바람이 불며 구멍을 가진 존재들이 웅성웅성 소리를 낸다 말한다. 그것은 말 이전의 말이라고 할 수도 있고, 어쩌면 말 이후의 말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가 제시하는 것처럼 문장어 이전 음성어에 주목한다면 우물거리는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들이야 말로 장자가 주목한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망각 이후의 말일 수도 있다. 이 웅성거림을 이야기하는 남곽자기는 자신을 잃었다(吾喪我)고 말했다. 자신을 상실한, 지배의 욕망을 잃어버린 존재는 어떤 언어를 가질까. 고목사회枯木死灰, 죽은 나무나 꺼진 재와 같이 생의生意를 상실한 뜻 없는 말을 구사하지 않을까.
욕망이 중요하다. 지배를 욕망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탈주를 욕망하는 말이 있다. 도망치는 말, 벗어나는 말, 미끄러지는 말, 붙잡히지 않는 말이 있을 테다. 지배적 언어의 전통이 있다면, 광언狂言의 전통도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망언망청妄言妄聽이 떠올랐다. '멋대로 말하니 멋대로 들어보소' 이 말은 과연 어떤 말일까. 낯선 타자와의 만남을 욕망하는 말로 의미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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