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R&D <블랙홀과 시간여행> 0323 발제
스티븐 호킹 : 절대성과 상대성 사이에서
무엇이 실제이고 진정한 진리일까? 시공간이 휘어져 있음을 인간은 어떻게 측정하고 감각할 수 있을까? 킵손은 블랙홀의 원둘레와 반지름을 측정하는 완벽한 자를 예시로 이를 설명한다. 중력으로 인해 자가 수축하는 것일 뿐 공간은 사실상 평평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에 주목해 보자. 일반상대론에서 휘어진 시공간이라는 관점은 하나의 패러다임이고, 평평한 시공간이라는 관점도 또 다른 패러다임이다. 평평한 시공간 패러다임의 물리 법칙들은 수학적으로 휘어진 시공간 패러다임 법칙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역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 패러다임은 수학적으로는 동치임에도 언어적 그림은 무척 달라진다.
블랙홀 문제는 휘어진 시공간 기법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 중력파 문제는 평평한 시공간 기법으로 잘 설명된다. 이론물리학자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패러다임이 최선일지 통찰하게 된다. 중력이 약할 때, 뉴턴의 패러다임과 아인슈타인의 휘어진 시공간 패러다임은 거의 같다. 수학적으로 거의 동치이다. 태양계의 중력을 연구할 때 물리학자들은 뉴턴 패러다임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일반상대론에 대해 이미 알고 있지만 인간이 지구상에서 중력의 영향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70년대에는 막 패러다임(membrane paradigm)으로 블랙홀 지평면을 설명했다. 지평면을 양전하와 음전하로 이루어진 얇은 막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이 때 막은 구의 금속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킵손은 이 설명에 대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전기장 휘어짐의 원인은 시공간 곡률 이외에는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년 뒤 자기장선들이 블랙홀의 회전에너지를 추출할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해 제트가스를 만든다는 사실이 수학적으로 도출됐다(블랙포드-즈나이엑 과정). 이 계산은 회전하는 블랙홀이 전압발생기처럼 동력을 만들어낸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블랙홀은 어마어마한 중력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만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블랙홀은 점점 커져서 온 우주를 다 삼켜버리게 되는 것일까? 블랙홀에 대한 일반적인 상상은 이런 모습이다. 그러나 블랙홀이 뭔가를 뱉어내고, 심지어 서서히 증발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스티븐 호킹이다. 호킹은 블랙홀 지평면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블랙홀이 충돌이나 바위 덩어리에 의해 충격을 받은 후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해 탐구했다. 그는 ‘블랙홀 지평면은 블랙홀을 빠져나오려는 광자가 중력에 의해서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지역의 가장 바깥쪽’이라고 설명되는 기존 정의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겉보기 지평면’이라고 이름붙였다. 호킹은 ‘멀리 떨어진 우주에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사건들과 보낼 수 없는 사건들 간의 시공간 경계’라고 새롭게 지평면을 정의하고 ‘절대 지평면’이라 이름붙였다. 다른 이론물리학자들이 절대 지평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을 때 호킹은 절대 지평면에 대한 방정식을 도출해냈다.
호킹은 근위축성 측상경화증으로 손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마음 그림과 마음 방정식을 사용했다.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호킹은 문장을 간결하게 다루는 법을 배웠다. 분명하고 간결한 표현은 그의 사고를 더 선명하게 만들어주었고 동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뛰어난 생각과 직관을 가진 호킹이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호킹이 패배한 분야는 베켄슈타인의 블랙홀 열역학이다. 블랙홀 지평면의 면적 증가 정리는 열역학 제2법칙과 닮아 있다. ‘지평면 면적’을 ‘엔트로피(어떤 공간의 ‘무작위성’의 양을 의미)’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호킹은 당시 블랙홀 지평면은 어떤 무작위성도 가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호킹의 주장대로 블랙홀이 엔트로피를 가지지 않을 경우 우주의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으며 열역학 제2법칙(고립계에서 엔트로피는 증가)을 위반하게 된다.
호킹은 열역학 제2법칙의 위반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블랙홀의 본성이라고 본 것이다. 베켄슈타인은 열역학 제2법칙이 성립하게 될 블랙홀의 면적과 엔트로피 사이의 관계를 추론했다(플랑크-휠러 면적). 베켄슈타인은 이 거대한 규모의 엔트로피가 블랙홀 안쪽에 있다고 추측했다. 블랙홀 내부에는 거대한 수의 원자 혹은 분자 등이 있어야 하며 모두 무작위로 분포되어 그들이 분포될 수 있는 방법의 수는 10¹⁰의 79가 되어야 한다. 킵손과 호킹 등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모두 블랙홀의 내부엔 특이점이 있지, 원자와 분자가 있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나 1972년 블랙홀 법칙은 열역학 법칙과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표면 중력 역시 블랙홀 온도여야 하며 그 온도는 0이 아니어야 한다. 열역학 법칙에서 0이 아닌 온도를 가진 모든 물체들은 아주 작은 양이라도 복사를 방출해야 한다. 베켄슈타인은 이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이에 대한 첫 번째 실마리는 젤도비치로부터 나왔다. 젤도비치는 “회전하는 블랙홀은 반드시 복사한다. 복사가 블랙홀에서 이탈할 때 블랙홀은 걷어차일 것이며 그 때문에 점점 느리게 회전하게 되고 결국 회전을 멈춘다. 회전하지 않게 되면 블랙홀은 복사를 멈춘다. 그리고 그 후에 블랙홀은 완벽한 구 모양으로 회전하지 않은 상태로 영원히 남게 된다.”고 추측했다. 전형적인 젤도비치 식의 증명이었다. 비유 이외에는 어떤 것도 없는 순수 물리적 직관에 의존한 증명이었다. 젤도비치는 논문을 발표했지만 물리학자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킵손도 젤도비치와의 내기를 까먹을 정도였다.
1973년 호킹은 모스크바에서 젤도비치와 그의 학생이 스타로빈스키를 만났다. 회전하는 블랙홀이 복사한다는 젤도비치의 주장에 호킹은 흥미를 보였고 이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미국의 몇몇 물리학자들이 양자역학과 일반상대론의 부분적 결합을 시도했고 1974년 초 블랙홀의 회전에너지가 모두 바닥나 방출이 멈출 때까지 블랙홀은 반드시 복사를 방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게 된다. 그 때 호킹은 괴이한 예측을 담고 있는 짧은 논문을 발표했다. 호킹은 “회전하는 블랙홀은 반드시 복사해야 하며, 또한 블랙홀이 회전이 멈출 때도 복사는 멈추지 않는다”고 예측한 것이다. “어떤 회전도 없이, 어떤 회전에너지 없이도 블랙홀은 모든 종류의 복사를 계속한다. 복사할 때 계속해서 에너지를 잃게 되고, 잃어버리고 있는 에너지는 블랙홀 안쪽에 있다.” 호킹의 계산은 고온 물체의 열 복사 스펙트럼과 정확히 일치했다.
블랙홀이 질량을 밖으로 흐르는 에너지로 바꾸면서 계속해서 복사함에 따라 그것의 질량은 감소하며 면적은 줄어들고, 온도와 표면 중력은 증가한다. 블랙홀은 수축하지만 뜨거워진다. 결과적으로 블랙홀은 증발하게 된다. 호킹의 결론은 당시 블랙홀에 대해서 알려진 모든 것을 위반했다. 몇 년동안 과학자들의 호킹의 계산과 자신들의 계산을 검사했다. 점점 한 명씩 호킹에 동의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물리법칙들을 만들어 냈다. 새로운 법칙들은 휘어진 시공간 속 양자장 법칙이라고 불렸다. 양자장은 양자요동으로 입자의 쌍생성 쌍소멸 법칙이 적용된다.
순간 존재했다가 주변에 에너지를 돌려주고 사라지는 쌍으로 존재하게 되는 입자들이 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블랙홀 지평면에 이처럼 한 쌍의 가상 광자들이 있을 때 광자 중 하나는 블랙홀에서 탈출하지만 다른 하나는 블랙홀로 떨어질 수 있다. 하나는 지평면 안쪽에 있게 되면 외부 우주와는 영원히 단절된다. 다른 하나는 블랙홀의 중력이 주는 에너지(질량)를 싣고 블랙홀을 빠져나온다. 질량이 감소한 블랙홀은 약간 수축하게 된다.
블랙홀의 증발은 일반상대론과 양자역학 간의 결합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휘어진 시공간 속 양자장 법칙으로 설명되는 블랙홀 증발만으로는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과학자들이 많다. 관측을 통한 절대적인 증거와 법칙을 통한 상대적인 증거 중 어느 쪽이 맞는지 블랙홀의 지평면 너머가 열리지 않는 한 내기에서 완벽하게 이길 수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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