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주의와 제국주의 사이에서 서발턴의 침묵을 알아듣기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구적 주체 모델을 비판하기 위해 스피박은 대담하게 주체에 비판적인 두 철학자를 끌어온다. 바로 푸코와 들뢰즈이다. 「지식인과 권력」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대담에서 푸코와 들뢰즈는 (자국의) 노동자들을 옹호한다. 나아가 노동자들이 이미 자신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피박은 온정과 낭만의 분위기가 살아있는 이 대담을 비판하면서, 서발턴 이야기를 시작한다. 스피박이 보기에 푸코와 들뢰즈의 기획은 주체를 비판하는 듯하면서, 서구를 보존하려는 이해관계에 얽혀있다. 가장 먼저 이들이 노동자투쟁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라 부를 만한 전 지구적 금융 자본주의나 국제 노동 분업에 대한 비판이 빠져있다. 서구 남성 지식인들에게서 흔하게 보이는 이런 태도에서 스피박은 무지나 주의력 결핍이 아니라 의도적 삭제나 오독의 분위기를 읽어낸다. 이 서구 지식인들의 태도는 결국 아시아를 투명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심판자의 역할을 버리고 주체를 탈구축하겠다는 의도는 명백하게 새로운 주체를 승인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배제한다. 들뢰즈의 ‘욕망’은 고정된 주체에서 생겨나지 않지만, 욕망하는 주체의 효과를 만든다. 이 욕망이 이해관계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설명은, 제3세계 서발턴의 침묵이나 자기파괴적 행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스피박의 입장이다. 마르크스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푸코와 들뢰즈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회의적 입장이다.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성급하게 혹은 급진적으로 결합하는 푸코와 들뢰즈의 견해는 오히려 이론과 실천이 서로 명백하게 분리되어 있음을 보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지식인이 대중을 대변할 수 없다고 말할 때도, 두 집단의 차이가 도드라진다. 정치적으로 자신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가 서발턴이라면, 지식인들은 실제로 이들을 대신해 말하면서 자신들을 투명하게 만든다. 스피박은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 푸코와 들뢰즈의 견해보다 훨씬 공고하다고 주장한다. 스피박은 마르크스의 계급의식이 욕망과 이해관계의 일치를 목적으로 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나는 노동자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말할 때, 푸코와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이 마르크스나 프로이트가 말하는 욕망보다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에 가깝다고 본다. 의식화된 주체의 욕망보다는 일종의 생존본능에 가까운 무엇 말이다. 스피박은 푸코나 들뢰즈가 마오주의와 노동자투쟁에 온정과 낭만의 태도를 보이는 배경을 감안해줄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푸코와 들뢰즈는 마오주의가 68혁명에 끼친 영향을 무시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68혁명 당시 청년들과 기성세대 사이에 끼여 청년들을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이런 옹호는 68혁명의 충격이 두 사람에게 지식인의 역할을 새롭게 성찰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기도 했다. 사실 두 철학자가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스피박은 두 철학자의 태도가 아닌 서구 철학 안에서의 역할과 결과에 주목한다. 두 철학자는 주체를 새롭게 도입하고 구분하고 분석하면서,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지 않는 형태로 강조한다. 스피박은 지식인 주체에게 부여된 제도적 특권을 개인이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나아가 프랑스 지식인들이 유럽의 타자인 이름 없는 주체의 권력과 욕망을 상상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을 대변할 수 있다고 말하는 두 철학자를 비판하면서 스피박이 드러내고자 하는 점은, 지식인이 타자를 자아의 그림자로 끈질기게 재구성하는 데 공모한다는 점이다. 분명하게 인식론적 폭력과 함께 나타나는 타자에 대한 온정은 타자의 주체성을 부인하거나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스피박은 ‘말할 수 있다’는 두 철학자의 믿음을 부정하면서, ‘서발턴은 과연 말할 수 있는가?’를 다시 묻는다. 서구 철학자들의 논의에서 노동자투쟁의 주체인 노동자들이 서발턴이었다면, 스피박은 피식민지 내부에 존재하는 서발턴에 주목한다. 식민화된 서발턴 주체는 계급을 특정하기 힘들 정도로 광범위하며, 서로 이질적이다. 엘리트를 제외한 피식민지의 거의 모든 인구가 서발턴에 포함될 수 있다. 기존의 서발턴 연구 역시 엘리트와의 차이로 서발턴을 정의한다. 스피박은 서발턴에 젠더를 부여하여, 여성 서발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스피박의 관심 대상은 생산양식 외부에 있는 (제3세계) 여성들의 서사이며, 서구의 남성 지식인들이 말하지 못하는 영역에 있다. 문제는 서구의 제국주의가 이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형태로 주체를 지워버린다는 점이다. 서구의 지식체계는 제국주의를 보지 못하게 만들면서, 스스로 조사자와 심판자의 역할을 자처한다. 스피박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 현상을 설명한다. “백인종 남자가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 주고 있다” 이 문장은 식민 주체에게 ‘명예로운 백인성’을 부여하는 억압의 역사를 증언한다.(103쪽) 스피박이 주목하는 사례는 사티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힌두의 과부 희생(화살)이다. 과부가 남편을 화장시킨 장작더미에서 스스로 죽음을 맞는 과부 희생은, 보편적인 힌두 전통이 아니었고 힌두교 내부에서도 논쟁거리였다. 주로 여성의 재산 소유가 허용된 벵골 지역에서 남편 유족들의 종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영국이 법으로 사티를 금지하자, 힌두 내부의 논쟁은 사라지고 피식민지 집단이 자기 문화에 가지는 충성심을 자극하여 민족적 반발의 주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과학적 미신의 형태였던 제의는 이제 법의 심판을 받는 범죄가 되고, 근대적 ‘좋은 사회’를 만드는 걸림돌이 되었다. 이 걸림돌은 제국주의의 ‘문명화 사명’으로 제거되어야 했고, 피식민지의 야만성은 다시 백인들의 계몽으로 구원받을 필요를 환기했다. 스피박이 사티를 옹호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스피박은 여기서 왜 여성의 존재가 전적으로 한 남성의 아내로만 정의되고 있는지를 묻는다. 스피박에게 중요한 점은 여성 피해의 강조보다 주체의 문제이다. 영국과 인도의 남성들은 사티에서 각각 구원자와 가해자라는 행위자로 등장하지만, 피해자인 여성은 행위자가 아닌 희생자로 나타날 뿐이다. 사티를 단순히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보는 관점은 사티를 행하는 여성의 행위를 지워버린다. 스피박은 사티를 행하는 여성과 순교자를 비교한다. 서구에서 순교자가 ‘자기-희생 이데올로기’에 도취된 사람으로 이해된다면, 사티를 행하는 여성은 단지 폭력의 희생자일 뿐이다. 이는 힌두 전통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성이 여성을 멀리하면서 금욕을 수행하는 존재라면, 여성은 자신의 육체를 파괴하는 방식으로만 금욕을 달성한다. ‘사티’가 힌두 남성에게 ‘존재’와 유사한 의미라면, 여성에게는 그저 ‘좋은 아내’ 정도의 의미이다.
스피박은 사티를 행하는 여성 서발턴에게서 이데올로기와 함께 주체성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발견한다. 특히 1926년 부바네스와리 바두리의 사티에 주목한다. 남편도 없었고, 가족보다 인도 독립 무장 투쟁과 관련된 바두리의 죽음은 여러 방식으로 기존 사티의 방식을 전유하면서 뒤집는다. 서발턴의 ‘말할 수 없음’은 이제 우리의 ‘알아듣지 못함’으로 연결된다. 스피박은 바두리의 말을 지금 인도 여성들이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낙담하지만, 서발턴의 ‘말할 수 없음’이 가져오는 인식론적 균열 역시 발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