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중국에는 순수문학이 없는가’하고 물으신다면 에레혼 《소설로 읽는 중국사 2》 5장과 6장은 각각 항일전쟁과 신중국 수립이라는 별개의 사건을 다루는 듯 보인다. 하지만
책에서 다루는 문학사적 사건에 주목해보면, 두 파트는 모두 ‘연안문예좌담회’와 연관된 작가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자오수리는 ‘연안문예좌담회의 강화’가 낳은 스타 작가이며, 딩링은 이 강화를 발표한 마오쩌둥이 비판한 인물이다. 이 좌담회에서는 많은 작가가 비판을 받았는데, 특히 딩링과 아이칭, 샤오쥔 등이 가혹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공산당은 지식인들을
회유하고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안간힘을 썼기에, 이들은 처벌을 면하고 이후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하향입오’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 그 결과 딩링의 경우 이전 작품에 드러났던 작가 개인의 내면세계는
없어지고, 대중의 생활과 투쟁만이 묘사된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문예강화’의 세례를 받고 그 누구보다 성공적인 작품을 쓴 작가는 자오수리였습니다. (본문 5장 가운데) 공산당 통치 지역인 해방구에는 ‘중국 공산주의의 발원지’인 상하이에서 유입된 지식인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 국민당의 쿠데타로 인해 상당수의 좌파 지식인들은 상해를 떠나야 했고, 이들은 이후 농촌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공산당으로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추종하였으나, 상당수는 러시아
혁명에 경도된 이들이었다. 이 지식인들이 마오를 비롯한 ‘국내파 당원’들과 사이가 좋았을 리 없다. 마오가 지식인들을 혐오했다느니, 지식인들이 마오의 학식을 무시했다느니, 하는 뒷이야기는 차치하자. 두 집단의 골이 깊어진 이유는 단순히
성향 때문이 아니었다. 마오쩌둥이 강령에 가까운 언설을 늘어놓은 까닭은, 주구장창 이어진 중국 공산주의의 정체성 문제와 연관이 된다. ‘중국에서
공산 혁명은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중국 공산 혁명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이 물음은 형식상 추상적이지만 실제로 중국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지식인/작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상당부분 메타적인 성찰만을
늘어놓았다. 이 ‘메타적’인 것이 문제가 되었다. 모든 소설이 인민을 선도하는 내용만을 담고, 정치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만을 전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루쉰은 ‘곤궁하고 바쁜 시기에 문학작품이 나올 수 없다’<혁명시대의
문학>고 이야기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런
시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 있을 뿐이다. <혁명시대의 문학>에서
생략된 부분을 덧붙이면, 이 시기에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 고민하는 작품은 환영받지 못한다. 세계적인 문학사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 혁명 시대 혹은
전쟁 시기에 인간의 본질을 논하고 지식인의 역할을 언급하는 문학작품이 얼마나 많았나. 이런 의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적 특수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짧게는 20세기의 절반을, 길게는 190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혁명의 구호가 모든 가치를 앞질렀으며, 이 시기에 한가로운 소리하는 문학작품은 배척의 대상이었다. 20세기 중국에서 일어난 혁명이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1910~1920년대 혁명(혹은
계몽)을 기치로 내세운 지식인은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1930년대
공산주의가 중국 혁명의 대명사처럼 자리한 시점부터 지식인들은 ‘인민대중’보다 우위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비판 받을 행보를 거듭했다. 지식인들은 여전히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었으며, 상대방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에만 골몰했다. <3.8절 여성의
날 소감>이라는 글에서 딩링이 지적한 바가 유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단순히 글의 내용이 공산당 지도부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은 아니다.
어쩌면 이 글의 존재 자체가 당시 공산당 지도부의 혁명/투쟁 방침에서 어긋나는 일이었으리라. 당시 문예계에서는 옌안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불만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혁명을
위해 옌안을 찾아온 작가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그들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불평등과 부자유가 만연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당 지도부를 받드는 관행이라든지, 직위에
따른 차별, 남녀 차별 등 각종 문제가 노출되었다. ……
이때 지식인, 작가들은 비판적 지식인의 입장을 자임하고 있었다. 문예좌담회는
이런 입장이 당시 중국에서 올바르지 않은 입장임을 분명히 했다. <강화>는 작가들에게 공농병의 “입장”에 설 것을 요구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공농병을 위한 문예가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_이현정, “예술의 정치화”의 관점에서 본 옌안 문예좌담회의
의미, 중국현대문학, 2017, 48쪽. “오늘날
개인주의적인 소부르주아계급의 입장을 고수하는 작가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공농병 대중을 위해 복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주로 소수의 소부르주아 지식인을 향해 있습니다. ……
반드시 공농병(책에서는 노농병으로 번역되었다.) 대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실제 투쟁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고 사회를 학습하는 과정 속에서, 점차
공농병 쪽으로, 프롤레타리아계급 쪽으로 옮겨가야 합니다._<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강화> 중에서” 마오의 문예강화를 뒤집어 말하면 당시 연안 지역의 지식인들은 실제 투쟁에 뛰어들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지식인들은 중국 공산주의 노선을 따르는 데에 있어 자의식을 버리는 과정을 겪게 된다. 공산주의 진영에 속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대중을 선도하는 역할에서 내려온 인물들도 다수 존재했을 것이다. 결국 딩링과 같은 작가들은 대중의 한복판으로 뛰어들며 자신의 작풍을 완전히 고치게 되었다. 반면 자오수리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문학’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어떤 사람은 자오수리의
문학 작품을 보며, 농민 당사자의 목소리를 담은 문학이라 높은 경지에 있다고 칭찬할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은 하방 이후 완전히 자신의 스타일을 바꾼 딩링의 창작 방식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현대 소설들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보인다. 정치적 메시지가 뻔히 보여서 수준이 낮은 작품이라고 비판받는다. 왜 중국에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 고뇌하는 문학이 없는가, 하는 불만이
터져 나올 법하다. 이러한 문제 제기가 충분히 이뤄질 수 있음에 공감하면서도 질문을 바꿔볼 것을 제안해본다. 왜 우리는 성찰을 촉구하는 문학이 더 가치 있는 문학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을까?
그 기준은 어디서부터 정립된 것일까? 하고 말이다. ** 해방구 문학과
사회주의 문학 사이의 연속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국통구 문학 역시 그냥 소멸된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문학은 해방구 문학에 국통구 문학이 흡수∙통합되는
가운데 생성된 것이므로 국통구 문학 역시 사회주의 문학에 융합적 일부로서 연속되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문학 초기는 실제로 이 연속과 융합의 내용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를 주된 과제로 삼았고, 그리하여 해방구
문학의 계승자들과 국통구 문학의 계승자들 사이에 사회주의 문학의 자기동일성 형성이라는 문제를 놓고 치열한 대립∙갈등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대립∙갈등은 사회주의 문학의 열린 전망을 향해 생산적으로
해결되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가장 비생산적으로, 당의 방침에
기준을 둔 정치적 해결이라는 억압적 방식(정풍 운동과 같은 해결 방식)만이 주어졌으며, 그런 상황 속에서 국통구 문학의 계승이
사회주의 문학의 형성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기회를 박탈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해방구 문학의 기왕의 긍정적 성격까지도 왜곡∙변절되었다. _ 전형준, 《현대 중국의 리얼리즘 이론》, 창비, 1997, 297-28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