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동아시아] 아시아는 세계고, 중국은 여전히 제국을 상상하고 있다. 2023-03-01 15:15
작성자

아시아는 세계고, 중국은 여전히 제국을 상상하고 있다. 

“동아시아는 본래 중화질서의 원리로 작동했다.” 

서구 국제정치학이 동아시아 사례를 설명할 수 없을 때, 변명처럼 소환된 문장이다. 변방의 사람이어서 그런지, 중화질서/조공질서/천하질서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다. 서구 국제정치학 논리가 동아시아에 적용되지 못함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하여 중화질서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했었다.

왕후이의 글에서 왜 그동안 중국과 동아시아 질서를 이해하는 틀로 중화질서를 언급 했는지, 어느 한 수업에서 한국만의 국제정치학 이론의 발전을 목표로 둔다며 천하관에 대한 리딩부터 시작했는지 이해되었다. 다원일체, 다양성을 한데 어우르게 하는 이 특징은 중국과 동아시아 질서를 가르는 획으로 작용했다. 사실 차등의 질서였다. 유교의 개념인 인, 의, 예, 덕, 화 등의 개념이 중화질서의 이론적, 실천적 측면에서 작용했다. 중화 질서 하에서 모든 행위체(이 글에서는 국가를 근대 주권국가로 봄)는 권력 개념의 차원이 아닌 대/소 차이, 원/근의 구별을 바탕으로 서로의 관계는 상대화되었다. 가령, 월남은 중국에 사대하면서도, 동남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사대의 대상이 되었고, 류큐와 조선은 교린의 사이였다. 이렇게 중화 질서는 중층적 구조로 행위체 간의 질서를 규정했다. 

질서에 대한 이러한 중국적 상상력을 근현대 중국사와 현대 중국으로 가져왔을 때, 꽤나 다양한 부분들이 설명될 수 있다. 홍콩, 마카오에 대한 일국양제, 대만, 개혁개방, 중국 지방정부의 다양한 발전 모델 등, 중국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다원일체’의 횡축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의 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부의 경제특구에 해외 자본을 도입하여 사회주의 경제를 보완하고 생산력을 확보하는 것, 하나의 국가를 궁극적으로 상정하여 중국의 중심부에서는 사회주의를 선택하고 새로운 소중화지역인 홍콩, 마카오(아마 대만까지)에 대해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를 허용하는 것, 왕후이가 본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다원일체적 현상들의 일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중국은 근대주권국가 개념이 중국에 적용되어 국민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중화질서를 기반으로 한 제국을 계속해서 업데이트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국가가 주권을 기준으로 평등하다는 근대국가관과 맞지 않았다. 중화질서 내의 서로 다른 행위체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차이를 보였고, 국민국가와 국민국가의 평등하고 단선적인 관계 형성은 기존 중화질서 내부에서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근대 국가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각자의 다름은 중화질서 안에서 인정되었고 궁극적으로 장기간의 안정적인 질서를 이루었다. 이랬던 동아시아의 행위체들은 근대 국민국가가 가져야 할 주권의 3요소가 완전하게 충족되지 않은 불완전 주권국가들로 거듭났다. 남북한은 분단국가이며, 홍콩/대만/류큐는 국가 수준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일본 또한 평화헌법 하에서 온전한 주권을 행사한다고 볼 수 없으며, 중국 역시 스스로의 제국적 속성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가장 희생된 것은 과거 중화질서 하의 번부, 속지에 해당했던 행위체들이다. 류큐와 티베트는 사실상 과거 중화질서에서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 행위체들이 가지고 있었던 특성은 근대 주권국가를 기반으로 한 국제질서의 도입을 통해 차별의 근거가 되었다. 동화의 논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논리가 이상하게 적용되었다. 류큐가 일방적으로 일본에 편입되고 이와 비슷하게 조공국 조선 역시 독립적인 국가로 분류되어 일본 식민화의 대상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청조는 번부에 해당하는 티베트의 자치가 열강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것에 반대하게 되었다. 티베트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중원의 문화로 대체하려고 했고, 티베트 입장에서 보자면 근대화는 곧 한화였다. 

한족 출신인 왕후이의 뒤틀린 시선, 일관되지 못한 서술이 여기서 나타난다. 관념의 지향점인 중화질서의 축을 티베트 문제를 재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왕후이의 티베트에 관한 설명에서 청조 이후 -> 1950-60년대의 소수민족에 대한 해방 -> 1990년대 시장화 및 세계화로 인한 티베트에서의 불가피한 사회문제 발생까지의 논의에서 무언가 일관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911년 신해혁명에서 티베트가 독립을 선언하고 이후 티베트가 고유성을 위해 저항하는 과정들은 티베트 외부의, 혹은 티베트 상위 소수의 모략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근대화 = 한화 = 서구화를 동일시할 수 밖에 없었던 티베트의 과거 질서에 대한 저항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맞을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시장화, 세계화로 인해 티베트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순에 대한 왕후이의 지적에는 일면 동의한다. 중원과 번부의 관계에서 시장을 기준으로 수직적인 분업체계가 구성되었으며, 이는 과거의 중화질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다만, 이에 대한 왕후이의 처방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중국이라는 제국을 상상하면서 결국 중국의 중심과 티베트 간의 양자관계 틀 내에서의 티베트의 민의를 반영하는 ‘정치화’를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티베트가 서양의 신지학을 발전시킬만큼 동서양의 가교 역할을 했다면, 제국적 상상력으로 티베트가 본래 가지고 있던 관계망을 회복시켜주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일 수 있다. 제국을 상상하면서 어설프게 받아들인 국민국가의 틀에 머무른 결과이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