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동아시아] 관계 과몰입은 감정손실을 유발할 수 있음2023-05-04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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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과몰입은 감정손실을 유발할 수 있음

에레혼

손절. 지난 몇 년 내 삶을 아우를 수 있는 단어를 꼽자면, 손절을 뺄 수 없다. 손해를 절단한다는 이 말은 원래 주식이나 코인 등을 투자하는 상황에서 나왔다. 이제 손절은 인간 관계를 비롯한 다양한 상황에서 관계를 끊을 때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용어가 되었다.

나의 사례를 동원하지 않아도 서슴없는 관계 단절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만남을 한없이 가볍게 여기는 세대. young하고 완전 MZ한’ 세태를 두고 우려의 목소리를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요즘 것들은 메말랐다며, 인간관계에 투자 용어를 가져다 쓰다니 말세라며. 하지만 나는 손절이라는 용어의 사용 범위 확장은 관계에 대한 통찰력이 발휘된 사례라고 생각한다. 자질구레하게 얽힌 연결고리를 정리하고 나니 얼마나 후련한 마음이 들던지. 사교성이 미덕이라며 모난 돌에 정 맞히려던 이들의 요구를 따라가던 20대는 감정적 손해의 연속 아니던가.

마침내 판이 깔렸다. 대코로나시대, 버티다 보니 나에게 딱 맞는 세태가 찾아왔다. 면대면 모임으로만 유지되던 가냘픈 관계들이 쉽사리 정리되었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에 몇 개월 체류하지 않았기에 사적모임 인원 제한 주먹구구 신경 쓸 필요조차 없었다. 어차피 이어질 사람 사이라면 카톡으로 충분히 소통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혼자 유학한다고 고생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유학에 방점을 찍고 그 걱정을 받아들였다. 말을 건낸 이 중에는 아마 혼자라는 부사를 강조한 사람도 있을테지만 말이다.

코로나가 독감 바이러스 정도로 위력이 줄어들고 나니 두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눈 앞에서 만나는 일을 그토록 고대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런 사회로 회복하는 상황이 달갑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이 소수라는 점. ‘언제 밥 한번 먹자’가 ‘코로나 끝나면 얼굴 보자’로 대체되었다는 말이 나온 지 2년 정도 흘렀을까. ‘엔데믹’이라는 괴상한 용어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정상을 회복한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분은 코로나 끝나고 그 사람들과 얼굴 봤느냐고.

관계 맺음에 대해 불신과 불안을 가지고 있기에, 《절연》이라는 책 제목을 보고 몹시 불편해졌다. 갈등하는 주체 간의 포용과 연대는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한데 어우러지고 뭉뚱그리는 방식으로 실현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에서 나이브한 이야기가 나오면 찢어버릴 요량으로 삐딱하게 책을 읽어 나갔다. 그리고 전반부의 세 가지 이야기를 읽고서는 이 프로젝트가 단순 구색 맞추기의 결과물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과 싱가포르, 중국의 작가들이 그리는 아시아는 치열하다. 21세기에 치열하지 않은 사회가 어디 있을까 싶지만, 아시아만큼 아등바등 산다는 서술어와 잘 맞아떨어지는 지역이 얼마나 될까. 표준을 정해 놓고 그것과 닮은 모습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사회상이 곧 아시아의 동시대성 아닐지. 이러한 표준으로부터 낙오한 주체는, 어떤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끊어내고 분리할 각오를 해야 한다.

<> <아내>는 ‘상식적인’ 가족 관계의 절단을 보여준다. <>에서 미요의 엄마인 나나코는, 아무런 상태도 아닌 것으로 살고 싶다는 딸의 말에 승낙한다. 일본의 시대별 유행을 따라가는 삶을 살았던 무난한 인물 나나코는, 딸 세대에는 ‘무’로 사는 것이 그들만의 표준이라고 믿는다. 물론 나나코는 다른 어머니들이 으레 갖게 되는 모성이 없었기에 미요의 결정을 더욱 쉽게 지지한 것이기도 하다. 이야기 결말부에서는 오히려 나나코가 ‘완벽한 무’ 그 자체로 밝혀지며, 딸에게 엄마가 아닌 괴물로 지칭된다.

오컬트와 SF가 섞인 듯한 <>를 지나, 알피안 사아트의 <아내>는 로맨스물의 탈을 쓰고 혼합문화 사회의 단면을 비춘다. 싱가포르 말레이인 무슬림 사회의 일부다처제라는, 한반도 땅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순한 단어가 조합된 세계가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 <아내>에서 이드리스와 아이샤가 헤어져야 했던 까닭은 두 사람의 계급 차이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회한에 사무친 이드리스의 옛사랑은 현 부인인 사우다의 제안으로, 마두라는 제도를 통해 알라신에게 인정받는 관계로 거듭난다. 실제로 싱가포르 무슬림이나 말레이시아 무슬림 사회 여성들은 마두가 그들이 ‘하나쯤 우리가 결정해도 되’는 주체적인(?) 제도로 인식한다나.

두 편의 이야기에 비해 <긍정 벽돌>은 임팩트가 약하다. 이 작품도 기업과 통제 사회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 출간된, 그것도 일관된 감정을 강요하는 사회상을 묘사하는 이야기를 작품집에 실은 것이 유독 고깝게 느껴진다. 작가 정신의 발현인지, 통제 사회 중국에 저항하는 지식인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인지. 대단원을 추구하는 중국의 전통적 사고 방식이 혐오스러웠다는 작가가 <긍정 벽돌>에서 보여준 결말도 결국 ‘산천이 춤추고 견우 직녀 얼싸안는’ 엔딩이 아닐까.

작품 간의 편차는 앤솔로지 프로젝트의 필연적 결과라고 옹호할 수 있다. 이렇게 변호하고 싶을 정도로 《절연》은 다양한 지역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장이라는 점에서 꽤 성공적인 작품집이다. (책을 다 읽지 않아서 섣부르지만…) 적어도 각 국가 문단 선생님들이 아닌 작가들이 한 데 모인 점 만으로도 통쾌한 기분이 든다.

“아무쪼록 절연에 대한 이야기들이 부식된 것은 끊어내고 더 강력한 연결점을 찾기 위한 자극이 되길 바랍니다.” 정세랑 작가의 말을 들으니 절연의 연()이라는 한자에 ‘가장자리’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절연이란 본체가 망가지기 전에 끝부분을 잘라내는 일인 셈이다. 그동안의 손절이 나의 핵심 감정에 손실이 나지 않도록 썩은 관계 주변부를 도려내는 작업이었지. 이렇게 위안을 삼으며 《절연》 속 다양한 절단면을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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