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푸코] 꼴려서 쓰는 글 꼴리려고 쓰는 글2024-10-29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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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낯섦> 발제문(III. 사드에 대한 강의)


기픈옹달([email protected])


사드도 모르겠고, 푸코도 모르겠고. 푸코의 글은 막막하고 낯설다. 제목이 <거대한 낯섦>이니 영 잘못 읽고 있는 건 아니리라. 이렇게 위안하며 듬성듬성 푸코의 논의를 따라가 보려 한다. 푸코는 1970년 3월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사드에 대해 강의한다. 그는 사드 말년의 텍스트 가운데 하나인 <쥐스틴 이야기>에 주목한다. 


그는 사드의 글에서 '진실'을 다루는 방법에 주목한다.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며, 내가 무대에 올리는 것은 바로 이 다른 사람이다. 따라서, 나의 말은 이 사람의 존재만큼이나 진실이다."(192) 이것은 '추론의 진실'이며, 푸코는 이것을 위해 욕망-진실의 관계를 분석한다. 책이라는 존재를 통해 욕망-진실의 관계에 놓여있는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말을 건네는 대상은 여러분의 감수성도 마음도 아닌, 여러분의 이성, 오직 이성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의 근본적인 진실, 악덕이 늘 보상을 받고 미덕은 늘 벌을 받는다는 진실을 증명하고 싶어요."(197) 거꾸로 이 말은 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합리성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고 할 수 있겠다. 같은 맥락에서 글쓰기는 합리성의 도구가 아니며, '개인적 몽상의 도구, 보조물 순수하고도 단순한 수단'이 된다. 즉 사드의 글쓰기는 '성적 몽환'이며 이 몽환을 다루는 글쓰기에 대해 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이런 질문에서 푸코가 찾아낸 글쓰기의 역할은 이렇다. 1) 글쓰기는 상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이어주는 매개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 매개적 역할이란 '현실 원칙을 상상력의 경계 너머 가장 먼 곳까지 밀어 붙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를 통해 상상력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다. '글쓰기는 현실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2) 글쓰기는 되풀이된 향락 원리이다. 3) 글쓰기는 향락의 무한정한 되풀이를 도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상력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한계를 넘어서게 만든다. 따라서 푸코가 말하는 글쓰기란, 사드에게서 발견한 글씨의 역할은 '열어젖힘'이다. '글쓰기는 한계 자체에 대한 탈한계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4) 글쓰기는 개인이 틈새를 획득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틈새란 무엇일까. 규범에서 벗어난 자가 '개인'으로 있을 수 있는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욕망을 다루는 글쓰기. 그래서일까. "진실을 말하기란, 사드에게 있어, 욕망, 환상, 상상력을 진실과의 어떤 관계 안에서 확립하는 것"(213)이다. 이런 까닭에 사드의 글쓰기는 '고독한 글쓰기'가 된다. "사드의 글쓰기가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 글쓰기인 까닭은 그것이 사드가 자신의 머릿속에 품고 있을 수도 있는 진실, 혹은 사드가 인정하는 진실, 독자와 마찬가지로 저자 자신도 설득되고 마는 진실을 통하여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의도를 조금도 갖지 않기 때문"(215)이다. 


"글쓰기는, 따라서, 극히 단순히 말하자면, 어떤 한계도 없는 지점에 결국 도달하고야 만 욕망입니다. 글쓰기는 진실이 되어 버린 욕망, 욕망의 형식을 지닌 진실입니다. 글쓰기는 되풀이되는 욕망, 한정이 없는 욕망, 어떤 [금지의] 법도 갖지 않는 욕망, 어떤 억제도 모르는 욕망, 외부가 없는 욕망이라는 형식을 갖는 진실입니다."(216) 


푸코가 사드의 글쓰기에 주목한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욕망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방법을 찾고자 한 것이 아닐까. 욕망이란 현실 규범을 넘어서는 것인 동시에, 그 스스로 현현하는 무엇이다. 푸코는 욕망의 존재 방식이 글쓰기의 작동 방식과 같다고 보는 듯하다. 욕망이 규범에 굴복하지 않고 파괴적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처럼,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글쓰기란 결국 개인, 욕망으로 존재하는 자를 위한 활동이다. 


두 번째 강의에서 푸코는 '장면'과 '담론'을 구분한다. 담론이란 성적 묘사 가운데 등장하는 긴 이론적 부분을 가리킨다. 사드의 작품을 읽지 않아 그 담론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다만 네 가지를 부정한다는 점만은 명확하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다. 범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범죄는 법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자연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이 존재한다면 죽음 - 자기 파괴양식에서 존재할 뿐이다.


신-영혼-법(범죄)-생명(자연). 이것은 이성, 합리성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철학적•종교적 담론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늘 신, 영혼, 법, 자연을 긍정해왔습니다. 사드의 담론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반면, '서양'의 철학적 담론은 이 네 가지 근본적 긍정, 이 네 가지 철학적 확언으로부터 출발하여 부정적인 규정성의 질서를 도입했습니다."(229) 여기서 문득. 과연 서양의 철학만이 '부정적인 규정성의 질서'를 도입했다고 할 수 있을까. '道法自然'이라는 말처럼 자연과 함께 존재양식(법), 그리고 당위성(도)을 이야기하는 동양의 탐구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 


무튼 푸코는 사드에게서 플라톤 이후 반복되었던 것과는 다른 담론을 찾는다. 플라톤 이후의 담론이 '너는 오직 너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한에서만 완전한 네가 될 수 있다'(228)라고 했다면 사드의 담론은 이와 다르다. 우리의 어던 욕망도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 자기 이익의 어떤 부분도 희생시키지 않는 것.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절대로 희생시키지 않도록 해주는 것. 욕망-이익-실존을 절대적으로 구제하는 것이 사드의 담론이다. 욕망이란 실현되어야만 하는 것인 동시에, 실존 자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푸코는 사드를 이렇게 평가한다. "사드는 우리의 [유럽] 문명에서 욕망이 늘 사로잡혀 있던 진실에서의 종속으로부터 욕망을 실제로 해방시킨 인물입니다."(266) 따라서 푸코의 문제의식은 플라톤이 구축한 '진실에의 종속'에서 어떻게 벗어나는가 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하면 사드에게서 욕망하기와 쓰기의 가능성을, 그 파괴적 충동을 읽었다고 할까. 


욕망-쓰기-진실-존재. 그의 논의가 흥미롭기도 하나 또 그렇게 아주 반갑지는 않다. 쓰기를 규범적 활동으로 인식하기 때문일까. 쓴다는 것은 복잡한 규정 - 문법, 문어적 관습, 논리적 순서에 나를 욱여넣는 활동이다.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원고지에 정서正書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 글쓰기의 기초에서 푸코가 말하는 것과의 거리란. 물론 욕망을 쓴다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일 수도 있지만 무튼 쓴다는 것, 언어적 형식은 진실과는 늘 거리가 먼 것 아닐까. 名者實之賓也. 동양의 철학자 가운데는 욕欲 대신 의意를 존재와 연결시키기도 했다. 마음에는 대상 없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는 말이다. 동양의 생生 철학자와 푸코의 유사점이 보이기도 하고, 뭔가 차이점이 보이기도 하는데, 그냥 같은 혹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는 식으로 퉁치고 넘어가도 될지. 힙하고 꼴리는 뭔가를 바라는데 영 쉽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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