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수호전 62회~70회 - 그리하여 천하는 평안해졌다2021-05-18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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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천하는 평안해졌다

에레혼

무엇을 듣고 와서 무엇을 보고 가는가 何所聞而來, 何所見而去.

들은 바가 있어 왔다가 본 바가 있어 간다 有所聞而來, 有所見而去.

- 혜강의 질문과 종회의 대답으로 알려져 있음

 

혜강이 갑자기 결말부에 등장하니 이 구절이 떠올랐다. 위 인용구가 무슨 선문답인가 싶으신 분들께 상황을 설명해보겠다. 죽림칠현 혜강은 위진남북조 할 때의 그 진나라의 사람이었는데, 이 나라는 조조의 책사 사마의의 후손들이 다스렸다. 사마씨 정권은 유교 질서를 극단적으로 강조했고 이를 거부하는 지식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혜강 역시 사마씨 정권을 보이콧했던 수많은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그렇다면 종회는 어떤 인물인가? 당시 사마소(사마의의 둘째 아들)의 사람이었던 인물로, 정권의 핵심부라고 보아도 무방한 사람이다. 혜강 같은 사람들이 종회를 달가워할 리 없으나, 문제는 당시 죽림칠현의 라이프 스타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처럼 자리했다는 데에 있었다. 종회도 혜강을 내심 동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종회는 혜강이 은거하고 있는 공간으로 불쑥 방문을 하게 된다. 하지만 혜상은 종회가 없는 것처럼 행동을 했다고 알려진다. 이에 실망한 종회가 돌아가려 하자 그제서야 혜강이 던진 한 마디가 바로 무엇을 듣고 와서 무엇을 보고 가는가?”이다. 종회는 실망한 투로, 하지만 나름 재치 있게 쏘아붙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종회는 혜강을 미워하게 되었으며, 사마소가 혜강을 처형하도록 만드는 데에 큰 공을 세운 사람 또한 종회이다.

자 그런데 이런 혜강이 갑자기 ≪수호전≫에 소환됐다. 맨 처음 설자에서 범중엄도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못 나올 것도 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혜강이 왜 등장했을까 생각하다가, 송강을 사로잡는 장숙야와 같은 글자의 호를 쓰는 인물이라서 넣었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게 10주 동안 ≪수호전≫을 읽으면서 터득하게 된 읽기 방법이다. 의미를 고민해보되, 아주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말 것. 이 작품은 아주 단순한 이유로 해석할 때 오히려 더 쉽게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교 질서의 반대편에 서 있는 대표적 인물 혜강이 황제를 위해 도적을 잡는 일도, ≪수호전≫ 세계관에서는 충분히 발생할 수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두 가지 물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먼저, 왜 꿈을 꾸는 사람은 노준의일까? 60회가 가까워오면서 작품 속 비중을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는 노준의는, 독자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아직 친숙하지 않은 인물일 수 있다. 이런 인물이 108명 모두가 사망하게 되는 배드 엔딩을 먼저 보는 선지자 역할을 맡은 셈이다. 물론 이조차도 아주 단순하게 해석해버리는 방법이 있다. 실제로 노준의 캐릭터는 당시 독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김성탄 역시 이 부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터. 후반부를 잘라버리면서 대폭 줄어든 노준의의 존재감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마 꿈에서 암시를 받는 역할을 노준의가 맡지 않았더라면 그는 70회본에서 그저 2인자로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 질문은 천자를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替天道行는 키워드에 대한 것이다. 이 문구는 왜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것일까? (여담이지만 313쪽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체천대행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지 않으면 이것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해볼까 싶었지만…… 변화무쌍한 ≪수호전≫은 발제문 작성 계획 조차도 빗나가게 한다.) 이 질문은 왜 그토록 송강은 귀순을 원하는가?’하는 것과 한 쌍을 이룬다. 그렇지만 두 물음의 성격은 조금 다르다. 귀순은 실제로 송강에 얽힌 고사-여몽이라는 문신이 도적들을 사면하고 병사처럼 쓰자고 아이디어를 냈다는 역사 기록-에 근거하지만, 천자를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는 문구는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프로파간다이기 때문이다. 황제 대신 도를 행한다는 무리가 알고 보니 황제 밑으로 들어가서 충성을 다하고자 한다. 통치자가 본다면 무섭다고 느낄 법하다. 작품 후반부, 황제를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는 말을 설명하는 송강의 말은 전형적으로 말투는 착하지만 알맹이는 무시무시한것들이다.

조정이 밝지 못하여 간신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용인하기 때문에 충성스럽고 선량한 자들의 입신출세를 허락하지 않으며, 탐관오리들만 가득 찼기 때문에 천하의 백성들을 해치고 있습니다. 송강 등이 천자를 대신해 도를 행하고자 할 뿐이지 다른 마음은 결코 없사옵니다. (63, 6 172)

나라에 천자의 도가 통하지 않으니, 우리가 그 도를 다시 통하도록 만들겠다. 62회부터 70회까지 양산박 패거리는 이 말을 여러 방법으로 달리 말한다. (이 대사의 압도적 지분은 단연 송강에게 있지만.) 자꾸 반복적으로 이 대사를 보니, ‘귀순밖에 모르는 남자로만 보이던 송강이 속내가 검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귀순을 하고 싶다는 거야, 도를 행하고 싶다는 거야?

아무리 소설 속 세계라고 해도 두 가지 가치는 동등한 크기로 양립할 수 없는 가치였나 보다. 원래 판본에서는 귀순 이후, 황제 대신에 도를 행하는-여기서 도는 양산박 방식으로 무력을 쓴 것이었고 이 무력은 반란군과 오랑캐를 향한다-108명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결과적으로 이들은 대부분 처참하게 죽는다. “국가에 충성도 하고 싶고, 하지만 황제에 대해 비판도 하고 싶고갈팡질팡하는 100회본, 120회본에 극약 처방이 바로 요참(腰斬. 허리 자르기) 아니었을까?

귀순이니, 황제 대신 도를 행하니 하는 키워드에 꽂힌 것도 어쩌면 ≪수호전≫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컸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꼼꼼히 읽기 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반봉건적이고 불온한 텍스트일 것이라 생각했다. 세미나를 진행하는 내내 뭔가 부족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되뇌었지만 말이다. 좀 더 반항적이고 조금 더 날뛰었으면 했는데, 작품이 종반부를 향해 갈수록 망나니처럼 보였던 캐릭터들이 점차 사회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높은 잣대를 치우고 보면 ≪수호전≫은 여전히 매력적인 텍스트이다. 애초에 메시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작품에, 작품의 주제라는 키워드에 기대를 가지고 보았더니 유효한 독해에 실패했던 것은 아닐지.

들은 바가 있어 이 책을 펼쳤지만, 기대했던 바와 다른 것을 보고 간다.” 이것이 ≪수호전≫에 대한 나의 감상이다. 고전 소설에 대한 통념을 부수고, 전공 지식에 대한 통념을 부수는 10주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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