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주권과 순수성 3장 - 아시아:지리적 공동체라는 착시효과2021-06-1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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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지리적 공동체라는 착시효과

에레혼

 

1937년 발발한 중일 전쟁이 일본이 무한 삼진을 함락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자 어떤 작가들은 중국이 저럴진대 조선의 독립은 물건너간 것이라고 간주하고 일본의 식민주의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다른 일부의 작가들은 이런 양상은 일시적이고 세계 파시즘에 맞선 민주주의의 승리는 예정된 것이라고 보면서 협력하지 않고 작가적 활동을 하였다. 조선인 작가들 사이에서 이러한 양극화가 격심해진 것은 1940 6월의 파리 함락 이후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근대세계가 낡아져 버려 결국 구체제가 되었고, 독일과 일본의 국가주의 파시즘이라는 신체제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 서양 대신에 근대 초극의 동양 세계가 이제 열렸다는 '해방감' 속에서 무한 삼진 함락 이후에도 협력하지 않았던 많은 문학기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신체제에 급격하게 흡수되었다. 이 무렵에 협력한 작가들은 이전의 협력한 작가들과 달리 근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뿐만 아니라 서양중심주의를 넘어서 동양을 회복하겠다는 강한 확신 속에서 일본 식민주의에 협력하게 되었다.

김재용, <민족주의와 탈식민주의를 넘어서 - 한설야 문학의 저항성을 중심으로>, ≪인문연구 48,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p.23.

 

 

아시아라는 단어를 최근처럼 많이 접할 기회도 드물다. ‘아시아 혐오를 중단하라(Stop Asia Hate)’는 구호는 코로나와 함께 촉발되었다. 동양인을 바이러스로 취급한다는, 교민들의 피해 경험담. 서구인들이 아시아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이 질문이 너무 추상적이라면,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아직 해외 여행이 자유로웠던 시절의 에피소드들을 소환해보는 것이다. 외국에서 ‘너는 중국인이니, 일본인이니?’ 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이야기, 혹은 공공장소에서 한국어로 떠들고 나면 자리를 뜰 때 크게 ‘쓰미마셍’이라고 외치라는 농담들… 이런 에피소드는 한국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현상은 여전히 드물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아시아 혐오를 중단하라’는 캠페인에, ‘중국발 바이러스로 생긴 혐오에 왜 내가 힘을 보태야 하냐’는 냉소 섞인 반응이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아시아는 아시아인과 영영 친해질 수 없는 단어가 맞다. 같은 한자문화권…, 동아시아 3국은 유교의 영향을 받은 나라로서… 따위의 말들이 관용어처럼 맴돌지만, 이 말에 배신감마저 느껴지는 경우도 자주 존재한다. 백 번 양보해서 한일이 문화적 저변을 공유하고 있다 한들, ‘비슷한 듯 다른’ 요소들이 타국을 여전히 타국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렇지만 ‘한 치의 용납할 수 없는 지점’을 뛰어넘어 세 나라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논의도 존재한다. 현재 같은 상황에서는 외교적 수사로도 ‘잘 팔리는 상품’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학계에서 동아시아가 뭉쳐야 한다는 당위성은 ‘굳이 반박할 이유가 없는’ 논제이다. 그런데, 현재 어떤 학자보다 동아시아 3국 비교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는 한 학자는 이 논제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 바 있다.

언제 그것이 ‘아시아’가 되었고 나아가 ‘공동체’가 되었을까? 일본, 한국, 중국의 학자들이 ‘아시아’를 거듭 제기하는 것에는 각 민족 국가가 설정한 정치적 한계를 넘어섬으로써 상상적 정치 공간을 새롭게 구축할뿐더러 대내적으로 ‘국가 중심’을 해소하며 대회적으로는 ‘서양의 패권’에 대항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역사를 보았을 때 대체 아시아는 어떻게 또는 언제 그런 공동체가 되었는가? (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글항아리, 2012, 190)

거자오광이든, <주권과 순수성>의 저자 프래신짓트 두아라든, 동아시아를 두고 비교 연구를 진행하는 이들은 아시아가 부각되기 시작된 때로 바로 만주국의 등장 시기를 지목한다.

당황스럽게도,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운 ‘새로운 (우리들만의) 문명’ 담론은 기존 서구 문명의 허위를 폭로하는 학술적 시도의 영향을 받았다. 당황스럽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일본이 아시아주의라는 담론을 형성하는 기초가 서구의 문명 담론에 대한 자성적 목소리를 등에 엎고 있기 때문이다. 스팽글러와 토인비의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181-183), 서구인들이 자신들의 문명에서 결핍을 찾는 기이한 현상을 목도할 수 있다. (보통 19세기~20세기에 자문화에서 결핍을 발견하는 일은 아시아인이 담당한 역할이었기에.) 이 결핍에 대해 토인비가 종교적 해결책을 갈망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서 도덕적 가치와 신비함을 발견했으리라. 이러한 서구 지식인의 인증 마크 발급은 여전히 아시아인에게 유쾌한 기억으로 회자되곤 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기존의 제국주의와 다른 결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도덕적으로 우월한 내셔널리즘을 고안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여기에는 패도라는 개념의 대척점으로 등장한 왕도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쑨원이 왕도를 일본에서 역설할 때에 이는 일본이 서구 열강과 같은 패도 정치를 일삼지 말라는 의도였으나, 일본은 패도를 휘두르면서도 그것을 왕도라고 포장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3장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20세기 초반 국가의 의도/요구와 별개로 ‘아시아적인 것’을 주장하는 단체들이 상당수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 단체들은 하나같이 “근대 세계 문제들에 대한 동양적 해결(208)”을 슬로건으로 내세우지만, 토인비 등이 갈망하던 ‘대안적 존재로서 동양’이라는 이미지를 달성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동양의 정신문명을 해결책으로 내세웠지만 동시에 “종교적 보편주의의 형체(208)”를 갖추었다. 19-20세기 동양 지식인들이 대안으로 서양을 부르짖고, 다시 한번 더 서구 지식인들이 대안으로 동양을 바라보는 과정이 랠리처럼 오고 가면서, 그 결정판으로 등장한 구세단체는 정말 우주라도 구할듯한 교리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구세사업이 항상 당시 국가들이 반제국주의적 내셔널리즘을 강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209쪽 후반부부터 210쪽에 걸쳐 나타나듯, 이들은 빈민 구제 사업이나 도덕 교화 운동 등에 앞장섰다. 하지만 국가에서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반길 수가 없었다. 구세단체는 통합적인 것을 내세우다 보니, 개인과 보편을 동시에 말하기도 하고(219), 단일성의 계보를 종종 이탈하기도 했다.(220) <주권과 순수성>에서는 이와 같은 단체들을 국가가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초월적 혹은 우주적 힘과 개인 간의 직접 통교는 중국에서 전혀 독특한 것이 아니나, 역사적으로 중국 국가는 그 사이에 개입한 경향이 있다. 우주의 원리에 독점적 접속을 주장했기 때문이든[제국], 과학의 우주론적 권위를 강제로 수호하려 했기 때문이든[근대국가들], 국가는 엄하게 종교성을 허가받은 조직들에만 제한시켰다.(220)

중국 대륙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던 구세단체들은 비로소 만주국에서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도덕회는 만주국이 사회적 인프라를 형성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만주 사변을 노자의 예언이 실현되는 사건으로 해석한 도덕회는, 중국적 전통을 기반으로 문명적 의제(229)를 구축했다. 이들은 만주국에서 도덕과 교화를 앞세운 사회 운동의 핵심 세력이었으나, 국가의 입장에서 눈엣가시와 같은 행동을 일삼기도 했다. 도덕회나 홍만자회 등의 단체는 국가에 대항하는 비밀 결사에 투쟁 원동력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237) 하지만 만주국의 관료들은 이 단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문교부 예교과 관리들과 여타 이론가들은 다양한 에스닉 공동체들과 단체들은 서양 문명과 구별하기 위해, 이들의 종교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종교단체들은 동아시아의 모든 민족과 에스닉 집단의 진수를 대변하는, 기본적으로 아시아적인 농본주의 공동체의 특질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었다.(239)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는 세력이지만, 통치에 도움이 되기에 떠안고 간다. 오히려 그들의 이미지를 국가 이미지 구축에 활용한다. 문장으로 정리해서 보면 실현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만, 1930-40년대 만주에서는 정치적 실험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실험정신을 패망을 직감한 일본의 몸부림 내지는 끊임없는 세력 확장으로 인한 자신감의 표출 정도로 요악하는 것은 부족한 설명처럼 보인다. 당시 만주국은 새로운 국가 모델을 만들 수 있다는 순수한 희망에 도취된 사람들로 가득했다. 후쿠나가 타다시와 같은 지식인은 다른 민족들은 개인주의적 서양사회와 구별되는 어떤 종류의 범신론과 공동체를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 정신은 사람들과 통치자가 완전히 하나가 된 일본인만큼 잘 발달하지는 않았다(240)는 주장을 하며, 아시아 전체를 이끌어야 하는 사명을 일본이 짊어지게 된 현실을 천명한다.

그동안 내가 아시아’라는 단어에 생경함을 느낀 이유를, <주권과 순수성> 3장과 연관짓는다면 그것은 논리적 비약일 것이다. 그러나 한3국이 아시아라는 카테고리 아래로 뭉쳐야 한다는 본격적인 논의가 등장한 것이 근래의 일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앞서 동아시아 비교연구 이야기를 했지만, 누군가는 넓은 시야를 위해 아시아를 강조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한일 연합이 서구의 학술계의 합종연횡에 대한 대항이라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세 국가가 연합되어 어색한 공동체를 만들 때 누구를 중심으로 뭉쳤는가 하는 질문은 유치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물론 이것을 정치 무대로 가져가는 일은 더욱 복잡한 문제이기에, 이런 공동체적 상상은 학술계에서나 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동아시아 삼국’이라는 말은 국제 학술 세미나에서나 어울릴 법한 수사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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