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코스모스-칼세이건] 상상력 없이는 단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여정2020-08-2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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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칼세이건] 1.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 2. 우주생명의 푸가 :: 발제 _ 아라차



상상력 없이는 단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여정



아인슈타인은 물리 법칙을 발견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라고 했다. 상상력은 얼토당토않는 무언가를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근접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인 것이다. 우리는 <코스모스>에서 언급되는 모든 과학적 팩트들을 상상을 통해 만난다. 코스모스는 영상으로, 텍스트로 보여지고 읽혀지고 있지만 눈 앞에 펼쳐지는 상상의 홀로그램으로 그려낼 수 있을 뿐이다. 이 과정이 지금의 우리에게 왜 필요한 일일까. 책을 읽어서 지식 정보 몇 개를 더 습득하자는 것이 아니다. 일상과 통념에서 벗어나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외부가 있다. 그리고 그 외부를 아는 것은 나를 알고 우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우리 앞에 놓인 탐험은 상상력 없이는 단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여정의 연속(37)이다.

 

자 이제, 코스모스를 상상해 보자. 인류는 영원 무한의 시공간에 파묻힌 하나의 점, 지구를 보금자리 삼아 살아가고 있다(36). 지구는 우주에서 결코 유일무이한 장소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전형적인 곳은 더더욱 아니다. 행성이나 별이나 은하를 전형적인 곳이라 할 수 없는 까닭은 코스모스의 대부분이 텅 빈 공간이기 때문이다(38). 우주에는 1000억 개의 은하가 있고 각각의 은하에는 저마다 평균 1000억 개의 별이 있다. 우리 은하 안에는 4000억 개의 별이 있다. 이 별들은 복잡하면서도 질서정연하고 우아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다. 이 별 중에 우리가 아는 별은 태양 하나 뿐이다. 태양계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행성들이 원형의 궤도를 따라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명왕성, 해왕성, 천왕성, 토성, 목성 등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코스모스에서 지구가 ‘아주 조그마한 세계’라는 인식은 현대인들이 기원전 3세기라고 부르는 시절에 시작됐다. 그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는 에라토스테네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천문학자이자 역사학자, 지리학자, 철학자, 시인, 연극 평론가, 수학자였다. 어느 날 에라토스테네스는 파피루스 책에서 6월 21일 정오에 수직으로 꽂은 막대기에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다고 적힌 내용을 읽는다. 이 날 이 지역에서 태양이 머리 바로 위에 있다는 뜻이다. 이 평범한 사건을 유심히 봄으로써 그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어떻게 보면 세상이 다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9). 같은 시간에 시에네의 막대에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데, 알렉산드리아에는 그림자가 생기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가 발견한 해답은 지구의 표면이 곡면이라는 사실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사람을 시켜 시에네까지 걸어가게 한 다음 그 거리를 보폭으로 재보고 시에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대략 800킬로미터 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때 계산한 지구의 둘레 25,000마일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 둘레의 길이다. 에라토스테네스의 발견이 있은 후 용감하고 대담한 선원들이 여러 번 대항해를 시도하고는 했다(51). 지구는 아주 조그만 세계라는 인식은 이어서 지구 바깥으로 나가서 우주를 관찰할 수 있게 했다. 

 

지구바깥의 수많은 행성에도 생명이 살고 있을까? 만약 살고 있다면 외계 생명은 지구 생명과 얼마나 다를까? 우리가 지구 생명의 본질을 알려고 노력하고 외계 생물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애쓰는 것은 하나의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 질문은 바로 ‘우리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이다(65). 우주에는 생물의 기본 물질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는 우주적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지구가 생명의 발생과 서식에 있어 완벽한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우연이며 얼마나 큰 행운이냐며 감탄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것이다. 지구의 자연환경이 인류에게 훌륭한 조건을 제공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모든 생물들이 지상에서 태어나서 바로 그곳에서 오랫동안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지구 환경에 적응 못한 종들은 모두 사라졌다. 우리는 다행히 잘 적응한 유기물의 후손인 것이다. 찌뿌린 사무라이 얼굴의 등딱지를 가진 게의 예시에서 진화의 바퀴를 돌린 것은 인간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인위 도태 혹은 인위 선택. 인간은 수 천년 동안 어떤 종의 식물과 동물은 잘 키우고, 또 어떤 것들은 죽여야 할지를 신중하게 선별해 왔다(71). 인간은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특정 형질의 품종들만을 선택적으로 번식시켰다. 이유가 무엇이든 인간은 특정 변종의 번식을 조장하고 다른 변종의 번식을 억제해 왔다. 전자는 우점종이 되어 크게 번성했지만 후자는 그 수가 크게 줄거나 혹은 멸종했다. 진화는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다(73). 돌연변이가 진화의 동인이 된다. 수많은 돌연변이들 중에서 생존율을 증대시킬 수 있는 소수만이 선택되므로, 오랜 기간에 걸쳐 생물은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서서히 변화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의 기원이요 진화의 실현이다(74).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과 자연 선택 이론에 심히 분개했다. 위대한 설계자가 모든 생물을 정성들여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자연 현상에 의미와 질서가 있고, 인간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인간적인 해석인가. 화석 기록이 “위대한 설계자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설계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종을 버리고 새로 설계해서 또 다른 종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 화석 기록과 설계자의 존재 사이에 생긴 모순을 화해시킬 수 있단다. 아니 그렇게 대한 능력의 설계자가 왜 처음부터 완전하게 만들지 못했단 말인가. 오히려 화석 기록들은 위대한 설계자가 저지른 시행착오의 과거와 그의 미래 예측 능력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약 30억 년 전 단세포 생물이 세포 분열 후 두 개의 독립된 세포로 되지 못하고 그대로 붙어 있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유는 돌연변이 때문이다. 이것이 최초의 다세포 생물이 태어나는 과정이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모듬살이를 하는 일종의 생활공동체인 셈이다. 사람 한 명 한 명은 수많은 생활 공동체가 모여서 만들어진 또 하나의 거대한 군집인 것이다. 10억년 쯤 부터는 식물들이 협동 작업을 통해 지구 환경을 엄청나게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산소 분자의 출현이다. 산소의 분해력을 대처할 수 없던 생물들은 무더기로 사라졌다. 대략 6억 년 전부터 새로운 형태의 생물들이 폭발적으로 지구에 나타났다. 캄브리아기 대폭발기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다양한 형태의 생물들이 바다에 우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생물들은 과거에 모두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오래된 암석과 화석 가운데 우리와 같은 동물들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종들은 잠깐 나타나 그럭저럭 살다가 완전히 멸종했다.

1000만년 전에 인간과 아주 비슷한 생물이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그들이 진화함에 따라 뇌의 크기도 현저하게 커졌다. 그 후, 지금으로부터 겨우 수백만 년 전에 최초의 인간이 나타났다. 인간의 DNA로 상상의 주파수를 옮겨보자. DNA는 완벽한 자기 복제를 통해 유전 형질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일을 한다. 인간의 DNA는 10억 개의 뉴클레오티드로 연결된 두 개의 나선이 이루는 매우 긴 사다리처럼 생겼다. 가로대를 가진 10억 대나 가진 긴 사다리이다. 뉴클레오티드들이 핵산을 조합할 수 있는 방법의 수는 우주에 존재하는 전자와 양성자의 수를 전부 합한 것보다 많다. 그 결과로 나타날 가능한 인간 개체의 총수는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의 수를 훨씬 능가한다. 핵산의 가능한 조합들 중에서 아직 구현되지 않은 조합이 무수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지금까지 지상에 살았던 그 어떤 인간보다 뛰어난 인간을 설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91).


생명의 기원인 물질은 지구 생성 초기에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런 실험을 가장 먼저 한 사람은 스탠리 밀러였다. 원시 지구에 있었을 가장 흔한 종류의 기체들을 모아 놓고 거기에 화합 결합을 깰 수 있는 정도의 에너지를 공급하니까 생물의 기본 재료가 될 수 있는 물질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누구도 원시 지구의 기체와 물을 시험관에 함께 넣어 각종 반응을 겪게 한 다음, 거기에서 무엇인가 꼬물거리는 것이 기어 나오게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원자 수준에서 시작하여 그런 생물들을 만들어 내는 실험은 20세기 말에 가서야 가능할 것이다(지금은 21세기니까 뭔가 꼬물거리는 게 나왔을까?). 

생물학은 물리학보다 역사학에 더 가깝다. 현재를 이해하려면 과거를 잘 알아야 하고, 그것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알아야만 한다. 역사학에 예견론이 없는 것처럼 생물학에도 확립된 예견론이 없다. 연구 대상들이 너무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물학과 역사학이 우리는 주는 교훈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타자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103). 외계 생명에 관한 단 하나의 예만 연구할 수 있어도, 그 하나가 아주 미미하다 할지라도 생물학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될 것이다. 적어도 우리와 다른 생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이미 거기에 도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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