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패와 우월 – 중국 보수주의의 변천사 방법으로서의
중국/ 제 10장-어떤
반양무/ 20211202/ 에레혼 대륙신유가는 ‘화이의 구분’에 의거하여 중국은 서양에서 수입한 민주제도를 버려야 하며 설령 현실에서 중국에 서양식의
민주제도가 없다 하더라도 ─ 현재의 중국 정권을 위해 중국식의 천지인 ‘삼중 합법성’을 건립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민의 합법성만 과대한’ 서양의 민주제도를 비판한다. 장칭의
주장에 따르면, 선거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정부는 다만 “일국 국민의 그 때 그 지역의 현세적 민의의
인정”만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의견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렇게 민주제도로 선출된 것은 ‘일국 국민’이며
‘세계 인류’가 아니며, ‘그때 그 장소’이며 ‘천하 만세’의 정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여는’ 정부는 민의를 필요로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초월 신성’, ‘역사 문화’, ‘인심 민의’가
또한 천지인의 ‘삼중 합법성’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_
거자오광(양일모 역), <기상천외, 대륙신유가의
정치적 요구>, 《동양철학 48》, 2017, 232쪽. #1. 읽을 때마다 복잡한 생각이 든다. 1장을 펼치던 순간부터 오늘 살펴볼 마지막장까지, 책을 읽는 매
순간마다 골치가 아팠다. 책 내용이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방법으로서의 중국》은 나온 지 30년이 넘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80년대에 저자가 쓴 글이 현 시점까지 유효하다는 것은 뼈아픈 일이다. 한편으로는
이 책을 삐딱하게 바라보게 된다. 중국을 방법으로 삼자는 저자의 주장에는 공감을 할 수 있지만,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미조구치
유조가 《방법으로서의 중국》을 통해 내세운 문제제기는 여전히 중국 연구에서 주된 이슈로 자리한다. 중국
근현대사를 설명하는 편리한 방법 가운데 진화론적 사관을 빼놓을 수 없다. 중체서용은 여전히 낡은 담론으로
취급된다. 이러한 현실은 ‘중국을 방법으로, 세계를 목적으로’라는
구호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런데
책을 보던 중에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조구치 유조가 중국 다시 보기를 주장하던 1980년대 당시에도 이 책에 대한 비판이 꽤 많았나 보다. 사실
관계와 다를 수 있지만, 《방법으로서의 중국》의 <후기>를 보면, 미조구치 유조의 착잡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은 후일담보다는 자기 변호에 가깝다. ……긴 후기가 되어버렸지만, 이 책은
1940, 50년대에 청춘시대를 맞고 60, 70년대에 중국 연구를 해온 내가 이제 80년대의 마지막 해에 다음 세대를 향해 정리한 자기검토, 자기비판의
책이다. 이 책을 정리하도록 권해준 도쿄대학출판회의 가도쿠라 히로시씨에 의하면, 지금은
《다케우치 요시미 저작집》은 절판이 되었고,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그 이름도 모르는 사람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이런 사실로부터 생각하면, 1940, 50년대에 다케우치
요시미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필자의 이 책은 벌써 시대에 뒤쳐진 만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은 옛 시대의 시작은 옛 시대의 올바른 비판 계승에 입각한 것이었으면 한다는
바람도 있다. 본서가 예를 들어 양무-변법-혁명이라는, 90년대 젊은 연구자에게는 아무런 매력도 없는 이 구도의
비판에 집착한 것도, 그것이 70, 80년대에는 역시 올바로
비판해두어야 할 것이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는 나의 세대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해서는 굳이 현재의 관점과 도달관계에서 다시 쓰지 않고 오히려 10년 전의 문제의식을 남겨두었다. _<후기>, 282-283쪽. 미조구치 유조가 극복 대상이라 설정한 학자
다케우치 요시미는 정작 일본에서는 ‘옛날 사람’ 취급을 받는다. 미조구치 유조의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후기> 속 에피소드도
80년대 말엽의 이야기이다. 지금 중국의 근대성, 양무운동
재평가 운운하는 일은 ‘아무런 매력도 없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러한 키워드는 다른 모양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책에 등장하는 양무-변법의 구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자. 양무운동을 재평가 하는 미조구치
유조의 글들은, 양계초∙강유위와
같은 변법파를 과도하게 치켜세우는 80년대 시류에서 촉발되었다. 이후
중국에서도 이와 같은 양무운동 비판(혹은 변법운동 긍정)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일어났다. 그렇지만 현재는? 다시 강유위 등의 인물이 중국 철학의 주요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2010년대
이후로 중국 철학계에서 급부상한 신유가 그룹에 의해, 강유위는 어떤 근대 지식인보다 위대한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21세기 신유가의 시야에서 강유위는 공자를 신으로 추앙하는 국교를 수립하였으며, 황제 제도를 보호하고자 한 중국 고유 군주론의 수호자로 거듭난다.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으면, ‘중국 근대’를 뻔한 키워드 정도로 취급하는 일이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중국이 자기 충족적 예언을 실현했다고 선포한 지금이 중국 근대를 면밀하게 들여다보아야 하는 때이다. #2. 미조구치 유조가 10장에서 주목하는 인물은 유석홍劉錫鴻이다. 그는 다른 양무파 인사들처럼
유명한 인물이 아니다. 《청사고淸史稿》 등의 사서에서도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유석홍은 중국 사학∙철학계의
관심도에서 먼 인물이며, 양무에 반대한 보수주의자 중 한 명 정도로 가볍게 다뤄진다. 미조구치 유조가 유석홍에게 주목하는 까닭은
그의 인생 궤적 때문이다. 그는 근대 시기 동양의 보수주의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달리 서양 문물에
무지하거나,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배타적이지도 국수적이지도 않은 태도로 인해 서양의 기계문명의 정교함에 대해서도 지나칠 정도의 호기심 때로는 경의를
나타내었고, 또 필요하다면 탐욕스럽게 학습하는 의욕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좋은 예가 그의 포대砲臺 연구로서, 이것은 아직 영국으로 가는 항해 중에 영국령 몰타섬과
지브롤터항에 정박하였을 때 각각의 포대를 견학한 이후의 것인데, 그 성과는 귀국 후 <포대 축조의 모델을 구하는 상주문>, <포대 축조에서
아직 잘 되지 않는 것 열 가지를 총서왕대신에게 올리는 글> 등으로 실현하였다. _252쪽. 해외를 답사하고 돌아온 중국 지식인은 곧 서구
문화를 알리는 첨병과 같은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유석홍과 같은 인물은 서구 지역 시찰 경험이
자신의 유가 사상을 더욱 공고하게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머리 속에는 도를 실현하고 민을 두루
이롭게 해야한다는 유가 지식인의 행동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유석홍은 이익[利]에 대해 완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양무를 중국에 들이는 일이 시기상조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책에서는
양무에 대한 유석홍의 반응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영국의 공업화∙기계화를 보고도 ‘지극히 유가 지식인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런던타임즈사를 방문하여……왜 일부러 기계를 이용하여 2만여 명의 생계를 빼앗는
것일까라고 하며 경영자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했다. 그리고 결국 문제는 영국 산업의 활력과 민부의
풍부함에 있다는 것을 알고서, “한가지 일의 이익에 기대어 수만 명을 양육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조잡하고 천한 일에 안주시키고 (…) 유용한 심력을 황폐하게
해 생명력의 근원을 막게”된다고 썼다.
_255쪽. 또한 유석홍은 영국의 산업화 양상을 볼 때마다
변화의 원인, 변화로 인한 부수 효과 등을 연이어 생각했다. 기계화된
영국의 농가를 방문하고서 유석홍은 의숙(義塾, 공익적인 목적을
위해 기부금 등을 모아 지은 교육 기관)의 숫자를 묻는다. 이는
뜬금없는 질문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기기에
의해 부농이 경작일꾼의 비용을 아낀다는 것은 그들을 ‘안일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고, 한편 그로 인해
빈민으로부터 취로의 기회를 뺏는 것은 그들에게 ‘의식의 밑천을 잃게 하는 것’”(256쪽)이라는 사고에서 출발한 물음이었다. 이러한 사고를 통해 특정 부문의
이익 추구가 민생을 해친다면,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유가 지식인의 태도를 살펴볼 수 있다. 흔히 전형적인 유학자라고 하면 앞뒤가 꽉 막힌
사람과 동의어처럼 인식된다. 그러나 유석홍의 행보에서는 뜻밖에도 다원주의자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다원주의가 서양 문화를 오독하는 데에서 발생하였을지라도, “(유석홍이 쓴) 《영요사기》 속 무도회라든가 혼례, 장제 등은 모두 (동서양
간) 그 이질성의 확인이고, 상대의 독자성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독자성을 주장하기
위한 소재”(266쪽)로 활용된다. 이렇게
상대성을 인식하며 발현된 보수주의는, 중국과 다른 도道 위에 발현된 기器가 중국으로 들어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사고 과정 속에서 강화되었다. 정리하자면, 유석홍은
서구에 대해 무지했던 것이 아니라 서구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양무를 배척했던 보수주의자이다. #3. 미조구치 유조가 유석홍을 ‘발굴한’ 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지금은 중국에서도 유석홍을 다루는 학위 논문이 발간될 정도로 시류가 변화하였다. 여전히 유석홍은 ‘양무운동을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을 거론할 때 등장하며, 중국
근대사 연구의 주류와는 거리가 멀다. 유석홍이 중국에서 수용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서구에 대한 열패 의식에 기반한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유석홍 부분을 읽으며 양계초가 떠올랐다. 양계초는 계몽 운동이 한참이던 20세기 초반, 유럽의 이성주의가 야기한 폐허를 직접 목도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을 변혁하겠다는 주장을 내세우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동경하던
유럽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계초의 이런 주장도 계몽운동에 대한 반기에 가깝다. 하지만 양계초는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송된다. 유석홍과
양계초 모두 굴절된 방식으로 중국을 바라본 인물인데, 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이렇게 마무리되는 것이
영 찜찜하다. 《방법으로서의 중국》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유석홍은
(왠지 모르게 인정하기 싫지만) ‘중국을 방법으로, 세계를
목적으로’ 바라보는 데에 성공한 인물처럼 보인다. 미조구치 유조가 지금의 중국을 바라본다면 어떤 식으로
책을 마무리했을까? 오히려 21세기 중국은, 중국이라는 방법론 이외의 것이 전무한 사람들의 나라가 된 것은 아닐지. 중국을
독해하겠다는 차이나 리터러시 세미나의 야무진 목표를 좀 나눠서 볼 필요가 있겠다. 중국은 읽을 수는
있으나 풀어서 해석하기는 까다로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