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현대의 역사가 미셸 푸코 2~4장 발제_0418 아라차
2장 권력과 제도 푸코에게 권력은 단순히 가진 자가 나약한 자를 억압하는 수단이 아니다. 권력은 사람과 제도의 일상적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상적 관계 속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권력은 생산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어서 어떤 특정한 행동양식을 검열하고 못하도록 금지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행동양식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권력이 억압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권력이 언제나 안 된다고만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그 권력에 복종하겠는가?”<성의 역사 1권> 푸코의 이 말이 암시하는 바는 권력은 억압적인 속성 말고도 사람들이 그것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세기에 영국 남자 어린이의 자위행위 감시 문제에서 “자위행위의 금지는 어린아이의 몸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부모와 자식 간의 육체적 관계를 성적 대상화함과 동시에 가족의 영역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었다. …권력이 섹슈얼리티를 억압했다기보다는 섹슈얼리티 자체가 권력의 긍정적 산물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어린이의 성에 대한 논의와 그들의 자위행위에 대한 감시와 충고와 처벌은 역설적이게도 일련의 가족관계를 성적 대상화함과 동시에 뒤틀린 성 관념을 낳음으로써 원래의 취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으로서의 권력 개념을 바탕으로 푸코는 권력 쟁취에 성공한 몇몇 민중 봉기의 사례들을 분석했다. 6~70년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억압적인 정권에 항거하고 이를 전복시켜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굴레를 떨쳐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푸코는 혁명이 반드시 억압에서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모든 권력을 법제화하고, 이를 통하여 국가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혁명이란 똑같은 권력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법제화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혁명은 사회가 운영되는 방식 중 몇몇 양태를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이 국민들의 사회적 위치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푸코는 <주체와 권력>에서 ‘반권위 투쟁’을 분석하는데, 이는 “여성에 대한 남성우위, 어린이에 대한 부모 우위, 정신병 환자에 대한 정신의학의 우위, 일반 대중에 대한 약藥의 우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행정의 우위와 같은 권력에 대한 반대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푸코는 이런 모든 투쟁을 국지적 혹은 현장 투쟁이라 정의한다. 푸코는 이런 투쟁들은 국가나 계급과 같은 거시적 권력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런 투쟁의 주요 목표는 권력기관, 권력 집단, 엘리트, 혹은 계급을 공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통치의 기술, 즉 권력이 행사되는 형식을 비판하는 것이다.” 푸코는 시대마다 각기 다른 지배 형식을 통하여 권력이 작동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공개 처형과 대중적인 스펙터클에서 감금과 감시로 변화되었음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이는 권력과 처벌의 메커니즘에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되었음을 상징하지만, 이것을 진보나 진화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푸코는 처벌에 일어난 이런 변화를 두고 권력의 사회적 행사 방식의 변화를 본다. 예를 들어 과거 정권에서 국왕은 국가의 화신으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권력은 국왕을 중심으로 위에서 밑으로 분배되었으나, 현재는 권력이 사회시스템을 통해 행사된다. <감시와 처벌>에서 또 다른 관심사는 훈육이 현대 사회에 깊숙이 스며드는 방식이다. 그는 병원, 감옥, 대학과 같은 여러 가지 제도를 검토하고, 각각의 제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훈육 방식을 분석한다. 훈육은 각 개인들이 내화하고 있는 통제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훈육의 궁극적 목표는 자기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훈육 구조 중 하나가 원형 감옥이다. 권력의 눈이 작동하고 있는 구조에서 사람들은 감시를 받지 않을 때조차 감시받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런 형태의 공간 구조는 특수한 권력관계와 행동 통제 방식을 생산하게 된다. 원형 감옥 속의 개인은 훈육의 응시를 내화해야만 한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고 그 책임 속에 내포되어 있는 권력 관계를 자신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권력관계의 주체이자 객체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푸코는 이론가들이 종종 국가와 제도의 견고함과 항구성을 전제하는데, 바로 이 때문에 변화의 가능성과 권력의 유약함에 대한 분석을 게을리한다고 보았다. 이는 국가를 하나의 개인처럼 의지와 의도를 지니고 있는 초인간적인 행위자인양 취급하려는 경향과 결별하는 것이다. 국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반드시 국가 개념 자체가 불필요한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국가가 아무리 전지전능한 제도라고 할지라도 실제 권력관계의 모든 영역을 다 포괄하지는 못한다. 부모와 자식 관계, 연인 관계, 고용자와 피고용자 관계 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인간관계는 권력관계다. 각각의 상호 관계 속에서 권력은 타협의 대상이 되며, 이 타협의 과정을 통하여 각 개인들은 사회적 위계질서 내에 편입된다. 물론 이 위계질서는 고정된 것이 아닌 탄력적이고 가변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잘못된 것이다. 푸코는 자본주의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기획을 가지고 작동한다고 보지 않았다. 자본주의 역시 하나의 시스템으로 여러 가지 모순된 충동들과 각기 자신만의 의제와 고유의 작동 방식이나 목표를 가지고 있는 제도들의 집합체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 반드시 각 제도들이 작동하는 방식과 아울러 각 제도의 내부와 외부에 존재하는 개인과 집단의 요구와 저항에 통제받는 방식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푸코는 단순한 인과관계보다는 부수적인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다. 단순한 인관관계를 바탕으로 역사를 설명하게 되면 과거 사건의 복잡성과 혼란스러운 성격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석자는 과거의 복잡성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분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권력관계를 분석할 때에도 부수적인 요인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분석하는 것이 단순히 인과관계를 찾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부수적 요인들을 분석함으로써 권력이 모든 종류의 관계와 사건과 행위를 통하여 사회 전체에 분산되는 방식을 분석할 수 있으며, 또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검토할 수 있다.
3장 담론 담론은 규범화된 언술의 집합체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다른 언술들과 예측 가능한 형태로 결합되어 존재한다. 담론은 일련의 규칙들의 통제를 받는데, 이 규칙들을 통해 특정한 발화와 언술들이 사회적으로 유통된다. 어떤 언술들은 광범위하게 유포될 수 있고, 또 어떤 언술들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유포되기도 한다. 담론의 실질적인 가치는 푸코가 주장하듯 권력관계와의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나타난다. 담론 분석에서 흥미로운 것은 담론이 통제되는 방식이다. <담론의 질서>에서 담론을 통제하고 생산하는 사회적 절차를 상세히 설명한다. 외적 배제와 내적 배제로 구별하여 설명하는데, 외적 배제는 사회적 금기, 광기와 이성의 구별, 참과 거짓의 구별이다. 내적 배제의 절차는 평론, 저자, 학문 분과, 말하는 주체의 희소성이다. 궁극적으로는 누가 말할 자격이 있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떤 담론이 공인을 받고 어떤 담론이 그렇지 못한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담론을 이론화하는 데 사용한 용어들이 에피스테메, 아카이브, 담론 구성체이다. 푸코는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 나타나는 여러 담론 구성체의 무리짓기 방식과 담론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며, 이런 관행의 총합을 ‘에피스테메’라 부른다. 이는 단순히 한 시대 모든 지식의 총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에 생산된 지식과 새로운 지식이 생성되는 원칙 사이의 복잡한 일련의 관계를 지칭하는 말이다. 푸코는 하나의 에피스테메에서 다른 에피스테메로의 전이는 담론 간의 단절과 불연속을 생성한다고 주장한다. 에피스테메 간의 단절은 급작스럽게 나타난다. 이는 일반 상식과는 달리 한 시대에서 더 나은 시대로의 진화나 발전도 아니고, 그 이전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대한 변증법적 반작용과도 다르다. 푸코는 에피스테메 개념에 내재된 담론의 한계점들을 설명함으로써 발전론적 역사관의 한계를 지적하고 동시에 현재의 지식 체계를 문제의식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카이브는 특정 시기, 특정 사회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의 범위와 형식을 정의하는 일련의 규범을 설명하는 것이다. 푸코가 사용하는 아카이브라는 용어는 명문화되지 않은 규범을 지칭하는 용어로 이 규범을 통해 특정 시대에 통용되는 언술의 유형과 담론 구성체의 총합이 생산된다. 담론 구성체는 특정한 형식의 언술들의 규칙적인 연합과 무리짓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언술의 무리는 일반적으로 특수한 제도나 권력기관과 연결되어 개인과 개인의 사고방식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담론 구성체는 일반 개인들에게는 견고하게 고정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담론과 권력에 대한 푸코의 이론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 지식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생산되었는지, 누구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을 통하여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정보가 권위와 특권을 부여받고 유지하는 방식을 추적할 수도 있다. 또한 담론 개념을 통하여 우리는 과거의 지배적 관점에 동화되지 않고 과거를 바라봄으로써 현재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지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적 문제점을 분석할 수 있다.
4장 권력/지식 푸코는 특정한 담론이 지배 담론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배제 과정을 주목한다. 그는 이런 배제 과정이 지식과 관련해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푸코의 주요 관심사는 특정 역사적 시기에 어떤 지식이 존재했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특정 지식이 다른 지식에 비해 더 우월한 정보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과정으로서의 사상적 물적 조건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의 지식을 구성하고 있는 지식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더 정확하게는 인간이라고 하는 이 신기한 대상체가 어떻게 지식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파헤치고자 한다. 지식 없이 권력이 행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지식이 권력을 생성하지 않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지식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이런 통찰은 지식이 정치적 고려가 배제된 순수한 것이 아닌 권력투쟁의 핵심적 요소임을 강조하고, 또한 지식을 생산하는 행위 자체가 권력을 추구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인문학 분야에서 학문적 연구는 여전히 주변화된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대개 권력관계에서 소외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소외 사람들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행위는 현재의 권력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푸코가 지식 생산 자체를 억압적인 것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주변화된 사람들이 주도적인 입장에서 생산하는 정보는 사회 계급 체계를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푸코의 관점에서 ‘사실’을 생산하는 것은 권력/지식이며, 개별 학자들은 단순히 권력/지식의 도구이거나 지식 공장의 종업원에 지나지 않는다.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주장처럼 영국 제국주의가 정점에 이르렀던 19세기 무렵 인도와 아프리카에 대한 학문적 대중적 정보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식민지 관료들은 점령지에 대한 정보를 생산해내는 것을 신성한 의무처럼 여겼다. 정보의 생산을 맡은 사람은 단지 식민지 관료만이 아니었다. 여행가나 소설가, 과학자 뿐만 아니라 식민 공간 속에서 보편 지식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본 사람들도 지식 생산에 동참했다. 식민주의 시대의 서구 학자들은 자신들만의 분류 체계를 피식민 국가에 강요하고 이를 마치 객관적인 국제 표준 지식인 양 제시하게 된다. 그러나 서구의 분류 체계는 객관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서구의 이익에 봉사하는 서구의 관점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하다. 지식 생산 과정은 언제나 배제의 과정을 동반한다. 푸코는 지식이 순수한 ‘진리’의 탐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정보를 가공하여 ‘사실’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과정 속에는 언제나 권력이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지식을 의심해야만 한다. 서구에서는 인간에 대한 ‘진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지적 움직임이 발전했고, 성찰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가설이 통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푸코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는 그 순간이 바로 권력이 우리에게 행사되는 순간이라고 주장한다. “나 자신에 관한 진리를 말해 본다면, 나는 다수의 권력관계를 통하여 하나의 주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 권력 관계란 타인들이 나에게 행사하는 권력임과 동시에 내가 타인들에 행사하는 권력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의 주체 혹은 개인으로 구성해 가는 과정에서 한 사람에 대한 지식을 생산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을 담론의 대상, 즉 권력/지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푸코는 지식과 마찬가지로 진리 역시 서구 철학 전통 내의 많은 사상가들이 가정했던 것과 달리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님을 주장한다. “진리는 세속적인 것이다. 진리는 다수의 제약 기제로 생산된다.” 푸코가 주장하는 바는 우리가 진리 혹은 진실이라 부르는 것은 광범위한 전략을 통하여 진리로서 구성됨과 동시에 진리로서의 위치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때 각각의 전략은 진리와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대안적 지식을 배제하고 공격함으로써 진리를 뒷받침한다. 어떤 사건에 대한 더 정확하고 논리적인 대안적 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푸코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런 대안적 지식 역시 특정한 부류의 집단에게만 진리로서 기능할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종류의 지식 생산 혹은 타인을 위해 말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그 의도가 제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억압적 권력관계를 재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존한다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종종 과거를 지나치게 일반화한다는 이유로 역사학자들에게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푸코는 일반 역사학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의도를 가지고 사료를 사용한다. 푸코는 근본적으로 역사의 진보라는 개념 자체를 문제시하고 있다. 역사가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보라는 개념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현재는 과거 사건의 불가항력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여러 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를 분석하는 것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단순 명료하게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를 연결해 주는 나약한 선들을 추적해 감으로써 왜 그리고 어떻게 현재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수도 있는지를 파악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