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미래] 3장 텔레파시 ~ 4장 염력 2021. 03. 19 걷는이 우리의 뇌는 전기를 띠고 있으며, 전자가 가속되면 전자기 복사를 방출한다. 두뇌 안에서 진동하는 전자도 일종의 라디오파를 방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호는 너무 미약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을뿐더러 전달된다 해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무작위 라디오파를 해독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과학자들은 EEG(뇌전도) 스캔을 통해 사람의 생각을 대략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다. 피험자가 동영상을 보는 동안 MRI가 두뇌의 혈류 흐름도를 3차원 영상으로 만들어낸다. 컴퓨터는 MRI가 찍은 복셀을 분석하여 피험자가 봤던 영상을 근사적으로 복원한다. 이 프로그램은 본 광경을 재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맴도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영상은 사진처럼 선명한 해상도를 갖고 있지 않다. EEG 스캐너를 개선한 ECOG(피질전도)는 두개골을 거치지 않고 두뇌신호를 직접 수신하기 때문에 해상도가 매우 높다. 두개골의 일부를 절개한 후 64개의 전극이 설치된 격자망을 삽입한 후 환자에게 특정단어를 들려주면 두뇌 신호가 전극을 타고 컴퓨터로 전달된다. 이 데이터를 모아놓은 것이 ‘생각 단어 사전’이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텔레파시와 다름없는 방식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뇌과학자들은 뇌-기계 인터페이스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생각을 읽는 기술은 머지않은 미래에 구현될 것이다. 이때가 되면 ‘생각 읽기’는 심각한 윤리적 문제와 법적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즉, 프라이버시의 문제뿐만 아니라 저작권법, 법정 증거나 권리 행사에 관련된 문서의 유효성, 정보유출 등의 심각한 문제가 초래될 것이다. 뇌에 삽입되는 칩인 ‘브레인게이트’는 마비 환자가 생각만으로 인공팔을 움직일 수 있게 함으로써, 신경보철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 장치를 일상생활에 쓰이는 여러 장치에 연결함으로써 마비 환자도 남의 도움 없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감각기관이 없는 인공팔에 센서를 달아 다양한 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도 개발되고 있다. 물체를 만졌을 때 느껴지는 촉감을 디지털로 구현하는 기술을 ‘햅틱 테크놀로지(감각기술)’라 한다. 두뇌와 두뇌를 연결하는 ‘뇌-뇌 인터페이스’를 이용하면 햅틱 테크놀로지뿐만 아니라 ‘마음의 인터넷’이라 불리는 브레인넷도 구축할 수 있다. 2013년에는 인터넷을 이용하여 한 사람의 뇌에서 발생한 신호를 다른 사람의 뇌로 전송하는데 성공했다. 이 기술이 발전하면 인터넷을 통해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메시지’를 교환할 수 있다. 미래의 오락산업은 냄새, 맛, 촉감, 소리, 영상이라는 오감과 함께 모든 종류의 감정을 종합한 ‘토탈 이머전(완전몰입)’의 형태로 진화할 것이다. 두뇌 정보를 공유하는 브레인넷은 문명 자체를 바꿔놓을 수도 있다. 인류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복잡한 생각을 기호로 표현하게 되었으며, 문자를 이용하여 방대한 정보와 지식을 축적해왔다. 최근 등장한 인터넷은 지구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통합하였고, 앞으로 브레인넷이 구축되면 전 세계 사람들이 감각과 감정, 기억과 생각을 교환하면서 또 한 번의 혁명이 불어닥칠 것이다. 니코렐리스의 말처럼 가까운 미래에 인간은 운영체제의 일부가 되고, 기계와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 ‘서로게이트’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축복인지, 아니면 인류가 스스로 초래한 재앙인지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단기적으로 볼 때 뇌과학은 마비 환자와 신체장애 환자의 고통을 덜어 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뇌과학은 세계 경제와 현대문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모든 과학 기술은 좋은 목적에 쓰일 수도 있고 악용될 수도 있다. 가난과 질병, 무지를 퇴치하지만, 한편으로 인명과 재산을 해칠 수도 있다. 지금 우리는 수동적인 관찰자에서 자연을 개조하는 적극적 창조자로 거듭나는 중이다. 미래에는 마음이라는 복잡한 세계를 관찰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조작하는 단계에 이를지 모른다. 뇌과학 기술이 지적능력을 향상시키거나 사람의 기억을 바꿨을 때, 우리는 진짜 기억과 가짜 기억을 구별할 수 있을까? 구별할 수 없다면 대체 ‘나’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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