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죄책》 제3장 마음이 병드는 장병들, 제4장 전범 처리, 제5장 탄바이, 죄를 인정하다 죄책감은 죄의식을 거쳐 나타난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도 없다. 죄책감에 사로잡히면 군이 병사에게 요구하는 명령을 수행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책에서 만나는 전범들은 대체로 군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던 자들이다. 죄책감을 거의 느끼지 못했던 전범들은 어떻게 죄의식을 느끼는 죄인으로 다시 태어났을까? 그 과정은 자기 인식의 변화와 전쟁을 포함한 세계 인식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이었다. 그런 변화 중에서도 지식인 계층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더 미묘하고 복잡했다. 제4장부터 등장하는 고지마 다카오는 도쿄의 엘리트 코스를 거친 인물로 러시아 소재 석유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징병되었다. 그에게 직장과 군대는 모두 국가의 이익에 공헌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제2장과 제3장은 목사이자 의사였던 오가와 다케미츠를 다룬다. 오가와의 삶에는 전쟁을 대하는 의료인의 태도와 함께 종교인의 태도가 드러난다. 오가와의 가족과 지인들은 대부분 지식인이며, 특히 종교와 관련이 깊었다. 그의 종교 생활은 일본의 우익애국주의와 늘 긴장 관계에 놓여있었다. 일본의 우익애국주의 역시 종교적 색채를 띠었기에 이에 반대하는 오가와의 태도 전반에도 종교적 비판의 태도가 엿보인다. 당시 일본의 종교인들은 우익애국주의와 거리를 두면서도 모호한 말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국가에 비판적 입장을 드러내기를 주저했다. 국가가 그 기능을 정상적으로 발휘해 나라 간의 평화를 보장하고 인류의 연대적 도의심을 환기하기 위해, 교회는 자신이 속한 국가에 대해 충성과 근로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는 변증법적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 교회는 부단히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러므로 한 국가가 죄악을 범한 경우, 교회는 그 고통을 더욱 많이 맛봄으로써 국가의 정의 회복에 봉사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이 세계에서 창조의 질서를 담당해야만 한다. (…) 교회는 이 의지의 대변자로서 각각의 민족과 그 문화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90쪽) 입대 전 오가와가 많은 영향을 받았던 신학자 구마노 교수가 당시에 썼던 글 일부이다. 오가와는 이런 신학자들의 말에 영향을 받아 국가의 죄를 대속하겠다는 신념으로 의대를 졸업한 후 군의관이 아닌 초년병으로 입대한다. 일본군은 의사인 그를 병원에 배치했고, 거기서 오가와는 ‘전쟁 영양실조증’으로 죽어가는 병사들을 만난다. 음식 섭취가 충분함에도 신체가 소화과정을 거부하는 ‘전쟁 신경증’이었다. 전쟁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일으킨다. 그러나 전쟁터의 현실은 관념을 넘어선다. (…) 기나긴 비인간적인 시간 속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격이 해체되는 위기를 맞이한다. (…) 전쟁을 직접 겪지 못한 세대는 가미가제특공대를 통해, 그 ‘영웅적인 죽음’만을 보고 전쟁을 관념적으로 파악한다. (…) 전쟁터의 최전선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관념에 의한 미화에 집착한다. 그러나 오가와는 현실의 시간은 길고 거기서 인간은 철저하게 몸과 마음이 짓이겨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126쪽) 1969년 오가와는 야스쿠니 신사를 국가가 보호하겠다는 ‘야스쿠니 법안’에 반대하는 운동을 했다. 전후에 안정과 풍요를 되찾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다시 치장하려 할 때, 유족이자 ‘공범자’ 중 한 사람으로서 외친 반대였다. 온몸으로 전쟁을 거부하며 죽어가던 병사들과 수많은 학살을 목격하며 ‘나는 왜 미치지 않는 것일까?’가 의아했다던 오가와가 다다른 지점은 결국 ‘죄의 자각’이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오가와의 자각에는 종교적 태도가 배어있다. 기독교와 죄의식은 아주 가깝기 때문이다. 종교인이 아닌 전범들은 어떻게 죄의식을 자각하게 될까? 종교적 희생 혹은 죄의식과 가까워 보이는 오가와와 달리 고지마 다카오는 현실의 우리와 무척 닮은 모습이다. 자신의 번영과 국가의 번영을 동일시하고 이익을 추구하며 누구보다 악랄하게 전쟁을 수행했던 고지마에게 죄책감은 거리가 먼 말이었다. 과거의 일본군이나 특무기관이라면, 붙잡은 중국인을 고문한 뒤 끝내 죽였을 것이다. 처지가 바뀐 이상, 우리가 저지른 짓을 그들이라고 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 아무 말 안 하다… …. 이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을 것이다. 공공연하게 드러난 것에만 동의하자. 그러나 내가 관여했다는 것은 완강히 부정할 것. (…) 5년간이나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혹사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어갔지만, 나는 견뎌냈다. 그만큼 괴롭힘을 당한 우리를 이제 또다시 전범이라고 보복하다니, 너무나 불공평하다. 전쟁은 국가와 국가가 벌이는 사투다. 전범이란 전쟁을 명령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139~140쪽) 당시 중국은 공산당 정부가 집권한 초기였고, 저우언라이가 전범 처우에 관여했다. 저우언라이는 전범들을 폭력적으로 다루지 않으면서 교화할 계획을 세웠다. 때리거나 고문하지 않으며, 풍족한 식사를 제공하고, 스스로 죄를 고백하도록 유도했다. 고지마는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자신이 한 일들이 죄라는 사실과 중국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무엇을 고백하라고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전쟁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시오. 그것만으로도 좋소.” “전쟁이란 이렇게 잔혹한 것입니다. 당신이 한 행위는 중국 인민에게 커다란 재난과 그 뒤에 남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알기 바랍니다.” 중국 측은 일관되게 지속해서 그렇게 말했다. 그뿐, 고소의 내용을 듣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지마 내면의 감정까지 묻는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가해와 피해의 사실에 대한 인식을 요구했을 뿐이다.(167쪽) 중국 측 요구는 단순해 보였지만, 고지마 같은 이에게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거의 5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전범들은 관리소에서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연극으로 상연했다. 전범들은 자신들의 가해를 보여줌과 동시에 피해자들의 고통과 슬픔을 체험했다. 이는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나 그 가족이면서 자신들을 5년 동안 돌봐준 전범관리소의 직원들 앞에서 이루어진 체험이었다. 죄를 고백한 후 기소 면제를 받아 패전 10년 후에야 비로소 일본에 돌아간 고지마는 전범이라는 이유로, 혹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일본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일본 사회는 그들을 빨리 잊어버리려 했다. 죄의식을 거부하는 이들은 죄의식이 자기 삶을 위축시킨다고 여긴다. 과연 그럴까? 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한 죄의식, 죄인으로서 삶의 태도를 결정하고 계속 살아가기 위한 죄의식은 불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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