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죄책》 제15장 아버지의 전쟁, 제16장 계승되는 감정의 왜곡, 제17장 감정을 되찾기 위해 제목에서 이미 강조하고 있듯 ‘죄책감’은 이 책에서 저자가 중요하게 언급하는 인간의 감정이다. 저자는 ‘감정을 억압당했다’거나 ‘감정을 잃어버렸다’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하는데, 이런 표현은 자칫 모호하게 들릴 여지가 많다. 다만 저자가 말하는 ‘감정’ 중 죄책감이 중요하다면, 이 책의 제목대로 전쟁과 죄책감의 관계를 짚어볼 만하겠다. 과연 저자는 죄책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왜 죄책감을 강조할까? 17장에서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의 정신장애를 진단, 연구하던 고쿠후다이 육군병원의 진료기록을 언급한다. 약 8,000건의 진료기록에서 병사 대부분은 자신의 증상과 죄의식을 연결하여 말하지 못했다. 이들을 진료한 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단 두 명의 군인만이 양민을 학살한 일에 대한 죄의식으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린다고 고백했다. 저자는 그들을 ‘자신이 저지른 잔학행위로 인하여 상처 입은 자’라고 표현한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그들은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했다는 사실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고통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죄책감이다. 저자는 죄를 부정하거나 담담하게 죄를 고백하는 대신 심하게 죄책감을 느끼는 전범들에게 주목한다.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죄인은 죄책감을 느껴야 하고, 이 죄책감이 단지 고통이 아니라 죄인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논지를 계속 따라가다 보니 떠오르는 텍스트가 있다. 바로 단테의 《신곡》, 그중에서도 〈연옥〉편이다. 사실 나는 단테의 이 종교적인 동시에 지나치게 자기중심적 텍스트에 별로 공감하지 못했고 잘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특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바로 <연옥>편이었다. 연옥에 있는 이들은 왜 하나같이 다들 고통스러워하며 흐느끼는가.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던 그들의 모습이 《전쟁과 죄책》을 읽으며 떠올랐다. 연옥의 고통은 지옥의 당당함과 대비된다. 단테는 지옥을 거쳐 연옥으로 향하는데, 지옥의 죄인들은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죄를 반성하지 않았고, 동료들끼리도 호통을 치거나 폭력을 사용하기 일쑤였다. 당당하고 뻔뻔하게 아무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이들은 구원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들에게는 죄책감이 없었다. 죄를 지었다는 고통 대신 자신이 받는 형벌 때문에 세계에 대한 원한이 차올라 저주를 퍼부을 뿐이었다. 반면 연옥에 있는 이들은 자신의 죄로 고통스러워했다. 단테는 연옥을 신체가 없는 영혼들의 공간으로 묘사했지만, 죄인들의 고통은 신체의 감각으로 표현되는 생생한 고통이었다. 죄인들은 지구의 끝에서 연옥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오른다. 그들을 기다리는 길은 구원이다. 죄책감은 용서받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에서 비롯되지만, 지옥의 죄인들이 보여주듯 죄책감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결국 죄책감은 형벌인 동시에 구원의 열쇠였다. 나처럼 종교에 무관심하기에 구원도 바라지 않는 이들에게도 죄책감은 중요한 문제일까? 역시 이 책을 읽으며 내내 고민한 결과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일단 죄책감은 가해자에게 고통을 안겨주기에 가해자들은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죄를 인정하지 않거나 전쟁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 않으려 드는 전범들이 그런 예이다. 저자가 책에서 언급한 8,000명 중 두 명에 해당한 군인들도 전역하자 죄책감에서 벗어났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감정을 크게 기쁨과 슬픔, 그리고 욕망으로 구분한다. 긍정적 감정을 통칭하는 기쁨은 우리 역량을 증대하며, 부정적 감정을 통칭하는 슬픔은 우리 역량을 축소한다. 죄책감 역시 슬픔에 속하며, 죄책감을 느낄 때 우리 역량은 축소된다. 이 책의 15장과 16장에서 아버지의 전쟁 범죄 사실에 충격을 받아 아버지의 범죄를 은폐하려 하거나 자기 삶에 회의를 느끼는 자식들에게서 이런 역량의 축소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죄를 자각하는 슬픔은 단지 슬픔으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 역량을 이해할 때 기쁨을 느낀다. 자기 죄를 자각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동시에 피해를 회복하고 용서받기 위해 애쓸 때 우리 역량은 점차 증대한다. 가해자의 회복은 이처럼 피해자의 회복이나 용서와 함께 이루어진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에서 언급하는 일본의 젊은 세대처럼 자신들의 ‘약함’을 내세워 가해를 옹호하는 일이 되풀이될 뿐이다. 비단 일본의 젊은 세대뿐일까? 피해와 ‘약함’만을 부각하다 보면, 죄책감과는 멀어지고 ‘강함’을 추종하게 된다. 베트남전 참전과 가해 사실을 사죄하는 일은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던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제국주의 피해와 분단을 이유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방위산업을 육성하며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과연 우리가 일본 젊은 세대의 어리석음과 뻔뻔함만을 탓할 수 있을까? 책을 덮으며 저자와 같은 일본 전후 세대가 느끼는 책임과 절망에 공감하게 되었다. 소수이기에 그들이 겪을 곤혹스러움과 외로움까지도. 이 책은 전범국가에서 태어난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 실망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모색하는 책이다. 한편으로 그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던 나는 오히려 더 곤혹스러운 마음이 되었다. 죄책감이라는 형벌이 없다면 구원도 없을 텐데, 무엇이 우리에게 죄책감을 일깨울 수 있을까?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 역시 그의 책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단테의 《신곡》을 자주 인용했다. 그 역시 죄책감과 구원에 대하여 자주 고민했을까? 왕성한 증언 활동을 하던 프리모 레비의 갑작스러운 자살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죽음을 두고 어떤 이가 이런 말을 했다고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는 단지 특정 가해자 집단이 아니라 자신이 포함된 인류 전체에 실망하고, 깊이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