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자 배후의 도전자를 위하여 (언더독의 문학사 강좌 후기) 에레혼 언젠가 각 잡고 이야기할 날이 왔으면 했다. '중국 문학 비평사'라는 전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할 날 말이다. 어떤 전공이냐고 누군가 물으면 중문과라고 하는 게 마음이 편할 때가 많았다. 소통에 어려움을 주는 다른 요소는 차치하고, 일단 이 전공은 이름이 너무 길다. 중국인들도 '문비사(文批史)'라고 줄여 부를 정도이니……. "중국+문학+비평+사"라니, 지나치게 거창하다. 거창한 이름 아래 학문 접근 방식에 대한 디테일은 사라지고, 내가 하는 공부가 이 전공과 어울리는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 때도 많다. 강의를 기획하고는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중국 문학의 도전자들: 언더독의 문학사(이하 '언더독 문학사')"는 처음 커리큘럼을 고민하는 단계에서는 그저 내 관심 분야에 대해서 다루는 자리였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니 이 강좌에 중국 문학 비평사라는 타이틀의 실천 방식이라는 의미 부여가 추가되었다. 중국 문학 비평사라는 복합명사의 사전적 의미는 간단하다. <중국 문학 비평의 역사에 관해 연구하는 학과> 재미있는 점은 앞의 문구에 나오는 비평, 역사, 연구는 유사한 단어라는 사실이다. 문학 비평은 작품이나 작가 혹은 문학 사조가 등장한 이후에 나오는, 후행 작업의 성격을 가진 경우가 많다. 역사라는 용어 역시 비평의 본질과 유사한데, 중국 역사 서술 방식의 대부분이 지나간 시간에 대한 평가 작업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연구 역시 이미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검토와 분석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고대 문헌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 때에는 더더욱 이런 과거의 자료에 대한 검토와 분석만이 유일한 연구 방식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많다.) 내 불만은 이러한 비평/역사/연구의 대상이 대체로 잘 알려진 것에 국한된다는 점이었다. 거자오광은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상사' 혹은 '철학사'라고 불리는 저작을 펼쳐보면 예지를 가진 철인들과 경전적인 저작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다. …… 사상사가들은 시대순으로 그들에 대한 장절章節을 안배하는데, 위대한 사상가에게는 한 장을, 그보다 비중이 적은 사상가에게는 한 절을 할애한다. …… 한편으로는 화려한 명부처럼 이미 세상을 떠난 천재들의 생애와 저작을 하나하나 해당되는 항목에 등록한 듯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치 영예로운 합격자 명단처럼 논공행상論功行賞하거나 공을 평가하여 그 순서대로 나열하는 듯하다. (50-51쪽) 이는 중국 사상사뿐만 아니라 문학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언더독 문학사'를 진행할수록 이 강좌에서 목표하고자 하는 바가 정전에서 배제된 문인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에 주목하는 것 외에도 기존의 문학사 서술에 대한 관점과 방법론의 재검토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굴원‧도연명‧소동파‧이탁오‧조설근이 충분히 주변적 인물인가, 하는 물음에는 반박이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6주의 시간은 '중국 문학사에서 주변부를 위한 자리 만들기'를 넘어, 문학이란 무엇이었고 그것은 지금 관점에서 어떻게 서술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언더독의 투쟁기를 살펴보는 작업은 마냥 통쾌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강좌를 통해 이런 곤혹스러움을 전달하고자 하는 괴팍한 심보(?)가 있었다. 중국 문학사 속 언더독들은 그들이 몸담은 시대와 주류 문학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다소 과격한 수단을 동원했다. 이들의 투쟁은 예상보다 지리멸렬한 방식으로,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진흙탕 싸움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동시대 문인의 화려한 글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춘추‧전국시대와 진‧한대 문풍을 복권하려 했던 소동파와 그 주변 문인들의 '고문운동'은 혁신인가 반동인가. 명대 문학계의 의고론에 비판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그 의고파들이 부정했던 팔고문에 동조하는 이탁오에게 당신은 찬성할 수 있는가. (물론 이탁오의 이런 입장은 세월의 내력과 문장의 우수성은 무관하다는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출발한 아이디어이다.) 강좌 매시간 던졌던 질문들은 내가 중국 고대 문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곤혹스러움이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도 지금까지 선택지 하나를 고를 수 없는 난제로 남은 딜레마이다. 누군가를 혁신파 내지는 반동으로 규정하고, 또 어떤 이를 모순된 인물로 이야기하는 일은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내 결론이다. 핵심은 이러한 양면적 요소가 한 인물이나 하나의 장르에서 공존 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강좌의 마지막에 다뤘던 《홍루몽》만 해도 그렇다. 중국 문학 연구자 상당수는 중국 고전의 정수 자리에 《홍루몽》을 놓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해당 작품의 스토리가 잘 짜여 있어서? 산문과 운문의 조화를 완벽하게 이루는 소설이라? 허구와 진실의 문제에 천착하는 메타픽션적 면모를 갖춘 작품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홍루몽》이 우수한 작품이라는 방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홍루몽》의 우수성을 뒷받침하는 요소들은 해당 작품이 소설의 통속성으로부터 이탈하는 작품이라는 근거이기도 하다. 즉, 어떤 작가나 작품의 '삐딱한 지점'이 꼭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이런 평가의 시선에는 후대인들의 욕망이 투영될 뿐이다. 애초에 강좌 공지를 쓰는 단계에서는 나도 언더독이라는 키워드를 '대항하는 약자'로 규정짓고, 그들의 자리를 복권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야망을 밝혔었다. 그러나 실제 언더독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이들의 투쟁 방식이 선한 방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관방 사서에 기록조차 될 수 없는 이들의 행보에는 현대인이 보기에도 '무리수'인 지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난 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활동하던 시대의 맥락, 그리고 그 활동 무대에 이전까지 퇴적되어온 역사적 맥락에 대한 다각도 접근이 필요하다. 흔히 이 강좌에서 다룬 언더독들을 전통의 대항자, 유교의 배반자로 규정하곤 한다. 그러나 동양의 선진적 요소를 발견하기 위해 언더독을 연구하는 일은 무용할 뿐더러, 그 언더독들의 의도를 제멋대로 해석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이탁오가 '미완의 근대' 혹은 '동양 근대의 맹아'로 꾸준히 소환되어온 데에는 이런 의도적 오독이 배후에 깔려있다.
강좌를 마무리한 이후에도 여전히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오리엔테이션에서도 언급하였지만, 해당 강좌의 언더독들은 주류에 맞서기 위해 링 위에 올라갈 최소한의 자격이라도 부여받은 이들이었다. 이청조李淸照, 주숙진朱淑眞, 왕단숙王端淑과 같은 여성 작가들, 그리고 《아녀영웅전》을 쓴 만주족 작가 문강文康과 같은 이들이야말로 중국 문학사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확보해야 하는 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물론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언더독의 문학사, 혹은 중국 문학의 도전자들에 대한 접근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언더독만을 위한 논공행상은 다음으로 기약하지만, 이번 강좌가 나중을 위한 초석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