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리터러시 ― 리디아 류, 《충돌하는 제국》 2020-03-12
충돌의 과실 비율 산정하기 에레혼 아편전쟁과 시대구분론 중국사와 관련해서,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숫자가 바로 1,840이다. 아편전쟁이 발발한 해 1840년. 근・현대 중국사와 중국 문학사를 배울 때 이 네 자리 수는 필수 암기 항목이었다. 이 해는 중국 근대의 원년이기 때문이다. 아편전쟁 발발 시기가 곧 근대 시작점이라는 사실을 배우고 나니 의문이 들었다. 중국인들은 왜 부정적인 사건을 근대의 시작으로 설정했을까? 중국사 연구에서 시대구분이 논란거리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논란은 ‘유물론적 사관에 따라 중국사를 나누려는 시도’, 그리고 이런 역사관을 극복하려는 ‘후대 학자들의 반성’ 사이에서 발생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사 시대구분 논쟁은 고대와 중세의 설정, 생산양식의 유무 따위의 개념 위주로 이뤄졌을 뿐이다. 아편전쟁을 근대의 서막으로 간주하는 것은 여전히 다수설로 인정된다. ‘서양에 의한 최초의 침탈’을 역사 분기점으로 설정한 중국인들의 심리를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충돌하는 제국》은 언젠가 읽어야 할 책 목록에 들어있었다. 여타 아편전쟁에 대한 책들은 사건의 기승전결을 충실하게 설명할 뿐, 아편전쟁의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런 교과서식 설명의 상당수는 모택동(毛澤東)의 언설을 참고한 듯한 서술로 마무리된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로부터 중국은 차츰 차츰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로 변화하였다.”1) 역사에 대한 상투적 서술이나 연구 방식을 벗어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충돌하는 제국》 1장에 대한 독후감은 의문이 해소되는 상쾌한 기분보다는 당혹스러운 기분에 가깝다. 책의 서두는 아편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적 국제정치와 연관되는 이야기이다. 여러 학자와 저술가들의 이론이 나열되는 1장을 읽으면서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여담이지만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세미나가 끝나지 않은 착각마저 들었다.) 혼란 가운데 중심을 잡기 위해서 리디아 류(Lydia Liu)의 정체성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비교문학 연구자이며, “언어횡단적 실천(translingual practice)”라는 개념으로 유명세를 얻은 인물이다. ‘modern’이 ‘近代’로 탈바꿈하는 순간 리디아 류가 제시한 개념과 동명의 책, 《언어횡단적 실천》에서는 번역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리디아 류는 외래 개념이 번역될 때 본뜻 그대로 유입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즉, 외래 개념이 타문화권이라는 매질(媒質)을 통과하는 순간, 사회 여러 요소에 간섭을 받으며 원래 의미에서 분리된 번역어가 탄생한다. 애초에 아편전쟁과 함께 들여다보고자 했던 중국의 ‘근대’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말한 “왜 중국인들은 부정적 사건을 근대의 시작으로 설정했을까?” 하는 질문에는 근대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정말 근대라는 용어에는 긍정적 함의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서구 개념이 일본에 들어와 번역되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야나부 아키라(柳父章)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일본에서 1942년 〈근대의 초극(近代の超克)〉이라는 좌담회가 열렸을 때, 참석자들은 ‘근대’라는 용어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내놓았다. ① “메이지시대로 접어든 이후로 우리가 실감한 우리의 근대란 그야말로 지옥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② “근대의 정체는 끊임없이 뭔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정신 상태의 일종이 아닐까요?”2) 근대의 영어 표현인 ‘modern’, 그 어원인 ‘modo―(바로 지금이라는 뜻)’ 또한 긍정/부정의 가치평가가 담겨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지식인들이 위에서처럼 상반된 입장을 보이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modern=近代”라는 도식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중국의 경우는 어떤가? 한자에서 지금을 뜻하는 ‘近’, ‘今’, ‘當’ 등의 개념에 대한 전통 인식을 일일이 언급하자면 새로운 글을 또 써야할 것이다. 간단히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중국인들이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때 동원한 사고방식이다. 고대 중국에서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예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춘추시대가 문제니 이전 시대의 질서를 회복하자던 공자(孔子), 당(唐)의 문체가 번잡하기에 예전의 글쓰기 스타일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던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 심지어 19세기 말 중국 전통화의 문제점을 비주류 전통화가의 화풍을 본받음으로써 해결하려 했던 당시 전통화단까지―이들은 모두 ‘요즘 것들’의 문제를 극복하려, 과거 가치를 소환한 인물들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탈피를 이끌어낸 사건이 바로 아편전쟁 발발, 그리고 사회진화론의 유입이다. 두 요소는 중국 특유의 ‘전통에서 대책을 강구하는 방식’을 폐기할 명분이 되었다. 중국에서 아편전쟁을 근대의 시작으로 설정한 데에는 ‘현 상황에 대한 부정적 인식―서구화에 대한 동경’ 등이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중국이 아편전쟁에 대한 피해를 강조하면서 ‘포성으로 시작된 근대’ 서사를 기획했다는 의혹도 지울 수 없다. 반식민・반봉건 운운하는 ‘모주석 어록’에서 보이듯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불가피하게 근대를 맞이했다’는 식의 서술은 서구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하기에 유리했을 것이다. ‘동일한 조건’이라는, 허울 좋은 말 《충돌하는 제국》에서는 ‘순수한 교류 모델로서 외국인들 사이의 첫 대면’(p.41)을 가정하는 연구 방식을 비판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쌍방 사이에는 소통이 필요하다는 당위성. 리디아 류의 지적대로, 이 소통에 대한 명령은 신대륙 정복과 같은 ‘(서구인에게) 미개척지 정복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퍼스의 순진한 가정대로 소통이 동등한 위치에서 이뤄질 수 있었는지 재차 질문할 필요조차 없다. 흔히 중국의 문제점을 짚을 때 주변에 대한 오만한 태도를 거론한다. 한 신화학자의 비판을 예로 들 수 있다. “왜 그들(중국인)은 항상 남에게 주었다고만 말하는가? 왜 받았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가?” 이 발언은 20세기 이후 자국 고대 신화에 체계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통탄했던 중국 지식인들을 겨누고 있다. 이런 비판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야만인으로 불린 것에 분개했으며, 전쟁을 통해 ‘대등한 위치’에서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자국 특산품이 잘 팔리지 않은 사실에 불만을 표출했다. 과장을 보태자면, 아편전쟁에 대한 의회의 결정을 두고 해당 사건이 영국에게 ‘영원한 치욕(permanent disgrace)'으로 남으리라 예언했던 글래드스톤(W. E. Gladstone) 역시 지성인의 태도로 제국의 충돌을 관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서구의 일부 학자들은 고대(중세)에서 근대로 중국 사회가 전환한 1840년의 사건에 자신들이 기여한 바를 찾아내려 했다. 《충돌하는 제국》의 지적대로라면 이들은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 만들어 놓은 근대라는 체계에 청나라를 편입시킨 영국의 의도는 무엇이었으며, 청의 변화로 인해 영국이 얻은 이익은 무엇이었는지―리디아 류는 영국과 청나라의 접점인 근대를 탐구하기 위해 ‘국제법’이란 프레임을 사용하고 있다. 청조가 적극적으로 국제법을 ‘만국공법(萬國公法)’으로 번역하려 했다는 사실은 ‘중국도 근대 사회로의 진입을 원했다’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국제 무역 시스템에 청이 편입되도록 만들고, 그들이 이전 사회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 이는 누구였는지 《충돌하는 제국》을 따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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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自从一八四○年的鸦片战争以来,中国已经一步一步的变成了一个半殖民地半封建的社会。" 모택동,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中国革命和中国共产党)〉, 1939.12.15. 2) 야나부 아키라, 김옥희 역, 《번역어의 성립》, 마음산책, 2011, p.57. ①은 문예평론가 가메이 가쓰이치로(亀井勝一郎)의 말이며 ②는 역시 문예평론가인 나카무라 미쓰오(中村光夫)의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