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기술/철학] 다양한 코스모테크닉스는 가능한가2025-03-1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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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24. ‘근대 초극’, 25. 포스트모던의 상기, 26. 귀향의 딜레마, 27. 인신세에서의 중화미래주의(1839~2046), 28. 또 다른 세계사를 위하여

 

이 책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후반부에서 육후이는 중국과 일본의 근대 초극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근대()을 넘어서려던 서양의 의도와는 달랐지만, 동양에서도 그 이상으로 근대를 초극하려는 열망이 강했다. 육후이는 동양이 근대를 도입하는 동시에 초극하려 했듯이, 리오타르도 동아시아적 사유를 토대로 서양의 근대를 극복하려 했음을 밝힌다. 물론 포스트모던역시 근대 초극처럼 실패한 기획이 된다.

 

중국이 서양의 과학기술에 집착했다면 일본 교토학파는 서양의 역사성에 집착한다. 니시타니는 동양에서 왜 역사의식이 발전하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이 역사의식은 기술과 시간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문제이다. 니시타니의 근대 초극은 일본 사회에 강요된 서구 문화와 테크놀로지를 초월하려는 바람에 기반한다.(326) 이 초월을 위해 니시타니의 스승 니시다가 발전시킨 절대 무의 개념이 동양적 존재론의 핵심 개념으로 도입된다.

 

민족주의를 통한 민족주의의 초극을 제안하는 니시타니의 논리는 니힐리즘을 통한 니힐리즘의 초극이라는 니체의 기획과 닮아있다.(330) 유럽 문화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교토학파의 전략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통한 전쟁으로 귀결된다. 절대 무는 정화의 방식으로 실현된다. 근대를 초극하겠다는 목표 아래 자신들이 서구와는 다른 세계사를 향해 간다고 본 교토학파는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전쟁과 무관하게 보며 정당화한다.(335)

 

모종삼과 니시타니의 기획 모두에서 관건은 시간과 역사성(서양의 시간 축으로 설정된)이다. 근대를 극복하려면 시간-물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육후이는 니시타니가 말하는 역사적인 것이 자신을 역사적 존재로 재구성하는 의식이라 본다. 세계를 역사로 보게 만든다는 이 의식에서 나는 진보에 대한 강한 집착을 엿본다. 억지로 주입(혹은 각인)된 동시에 질기게 자리 잡은 그 집착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근대는 극복될 수 없다.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기획에서 육후이는 그보다 40년 전에 몰락한 교토학파의 근대 초극기획을 떠올린다. 리오타르는 물질과 시간의 관계를 습관, 기억, 상기라는 세 가지 상이한 시간적 종합으로 파악한다. 이를 바탕으로 마네, 뒤샹, 뉴먼 같은 예술가들에게서 근대적인 것과의 결별이 아닌 근대적인 것의 상기를 읽어낸다.(349) 이 포스트모던 예술가들은 상기를 통해 규칙과 책임에서 스스로 해방되며 기입의 규칙을 넘어선다.

 

육후이는 니체와 니시타니가 니힐리즘을 통해 니힐리즘을 극복하려 했듯이 리오타르도 로고스를 통해 로고스를 극복하려 했다고 본다. 리오타르는 명경이라는 소재에서 드러나는 선불교의 사유를 로고스에 대한 물음으로 변형시켜 이해했다. 동아시아적 사유의 토대를 이루는 상기를 통해 서양의 근대를 극복하려는 기획이다. 그러나 이 상기가 근대화에 직면했을 때 동아시아적 사유의 최대 약점이었음은 알지 못했다.(357)

 

육후이가 근대 극복 시도의 나쁜(실패한) 예로 드는 지식인들의 보수화와 파시즘, 광신 옹호는 과장된 면이 있지만, 충분히 수긍할 만도 하다. 다른 방식의 사유나 변형 없이 방향만 재설정해서는 근대를 극복할 수 없다. 육후이는 코스모테크닉스의 복수성과 리듬의 다양성에 자기를 여는 일이 이런 변형과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기술과 테크놀로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범주들을 무효화하고 다시 만들어야 한다.(359)

 

기술-물음을 보편적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상이한 코스모테크닉스에 관한 물음으로 볼 때 대안이 가능해진다. 근대 테크놀로지를 문화 안으로 받아들여 변형시키고 특정 문화 내부로부터 형이상학의 범주들을 재전유해야 한다. 코스모테크닉스는 자아와 테크놀로지를 동시에 재발명하고, 도덕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에 우선권을 부여한다. 근대()-물음에 새롭게 접근할 방법으로 육후이는 이런 과정을 제안한다.(368~369)

 

유럽의 외부에서 근대를 극복하려는 시도들이 실패하는 상황을 보면서 육후이는 근대를 재설정하는 대신 에피스테메로써 코스모테크닉스를 재발견해야 함을 거듭 강조한다. 여기서 근대 테크놀로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세부적인 방향 변화 대신 육후이는 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문제 수정을 요구한다. 문화와 자연을 규정하는 인간과 우주 사이의 관계, 인간-우주 관계가 공존, 협치, 삶의 원리로 어떻게 재파악될 수 있는지의 문제 말이다.(378)

 

공해 감소 조치 같은 세부적 문제보다 근본적 틀을 수정해야 한다는 육후이의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그 근본적 틀을 우리가 어떻게 합의할 수 있을까? 형이상학적 철학의 물음으로 가능할까? 육후이의 지적대로 자본주의를 우리 시대 글로벌 에피스테메로 볼 수도 있지만, 지구 안에서 우리의 이해관계는 모두 다르다. 미국의 노동자와 한국의 노동자와 베트남의 노동자는 과연 같은 노동자라고 할 수 있을까?

 

테크놀로지는 글로벌한 문제이기에 근대 극복도 글로벌한 문제일 수밖에 없지만, 전선은 언제나 산발적이다. 육후이는 책 안에서 가끔 다양성과 다중의 리듬을 언급하지만, 과연 그가 상상하는 대안적 코스모테크닉스가 다양한 코스모테크닉스인지는 의심스럽다. 교토학파의 기획처럼 진보를 목표로 내세우며 모든 문제를 일거에 처리하겠다는 방식의 계몽은 폭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문제는 진보 없이 생존도 없다는 세계관에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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