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과학읽기] “과학 성자”라는 형용모순2025-04-08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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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읽기 0408 발제_아라차 7장 구원으로서의 과학 8장 과학성자


“과학 성자”라는 형용모순


근대과학의 정신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은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베이컨은 과학의 목표가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가졌던 주권과 능력을 되찾아주는 일”이라고 선언했다. 이런 믿음은 과학에서 인류의 물질적 생활 조건을 향상할 온갖 기술이 발원하리라는 믿음에 기초했다. 성경이 그저 자연을 정복할 것이라 선언했다면 베이컨은 과학이 그 기술과 방법을 제공해줄 것이라 믿은 것이다. 


베이컨은 과학이 가져올 세계에 대한 구상을 <새로운 아틀란티스(1627)>에서 펼쳐보였다. 책에서 묘사된 과학자는 가부장적 사제와 비슷한 모습이라는 점은 여전히 주목할 부분이다. 인공 금속과 각종 보석, 잠수함같은 전쟁 기계, 망원경과 청력 개선 기구까지 책에 등장한 베이컨의 온갖 상상은 현대 과학으로 대부분 실현된 것들이다. 단 한 가지 빠진 것을 꼽는다면 컴퓨터 정도일 것이다. 동물을 약품이나 화학물질 시험에 쓸 수 있다는 생각도 이 책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세계를 정복, 변화시키는 힘으로서의 과학관은 이렇게 17세기 초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결실을 본 것은 19세기 말부터이다. 물리학은 기술 혁명을 일으켜 서구의 생활양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산업 혁명에 주춧돌이 된 열역학과 전자기 이론은 베이컨적 혁명의 주역들이다. 베이컨이 시사했던 대로 “더 나은” 미래가 과학에 있다는 신념이 점차 커졌다. 과학은 윤리와 도덕까지도 책임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20세기 초 한 유전학자는 “물리학과 화학은 우리를 부유하게 했고, 생물학은 건강하게 하며, 제레미 벤담이 했듯 과학 사상을 윤리학에 적용한 것을 성자 열 두명보다 더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17-8세기 베이컨의 과학관과 19-20세기 과학관은 중요한 차이가 있다. 베이컨에게 과학은 단연코 종교의 시녀였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면 과학과 종교는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진다. 과학의 투사들은 과학이 그리스도적 체제와는 무관하게 인류의 구원을 성취하리라 여겼다. 그들에게 과학은 그 자체로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데이비드 흄, 드니 디드로, 콩도르세 후작 같은 이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859년 발표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이런 적대감의 격전지가 되었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것이 아니고 “더 낮은” 생명체에서 진화하였다는 생각은 일찍이 물리학자들이 발견한 그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위태롭게 하였다. 인류가 그리스도교와 과학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종교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리라는 약속을 택할지, 과학을 통해 이룩할 지상천국에 대한 약속을 택할지. 점차 후자를 택한 쪽이 득세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될 것이었다. 


19세기 말에 과학의 응용가능성을 새로이 발견하면서 과학은 이제 신사 계급만의 소일거리가 아니라 전문 활동이 되었다. 과학적 훈련을 받는 사람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고, 이 수요를 맞추고자 MIT, 런던 왕립 과학 대학, 베를린 공과대학 등 기술학교가 많이 생겨났다. 과학이 더는 귀족적인 일이 아니라 당당한 직업이 되었다. 공학자(엔지니어)라는 직업이 급부상했다. 


이쯤에서 등장해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저자는 우선 묻는다. 아인슈타인이 그처럼 존경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패러데이, 맥스웰, 하이젠베르크, 보어, 슈뢰딩거 등보다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아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실로 천재 그 자체를 상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의 중요한 일부가 “아인슈타인이 다시금 과학에 초월성을 돌려주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말한다. 산업혁명을 거치는 동안 “물리학이 생활 속으로, 실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던 한 세기 뒤에, 아인슈타인은 다시금 물리학자들의 시선을 하늘로 돌려놓았다. 그의 일반상대성이론은 천구들의 조화라는 고대 피타고라스적인 개념의 수학적으로 세련된 현대판이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 대한(그 적용이 아니라 내용에서) 거의 종교적인 태도를 부활시켰다. 베이컨적 정신이 물리학을 지배하던 짧은 한 세기가 지나고, 아인슈타인은 다시금 피타고라스적 정신을 도입했으며, 그럼으로써 수학적 인간들의 마음 속에 창조의 “신적” 계획이라는 개념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오늘날 물리학자들이 “신의 마음”에 사로잡힌 시작점은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위대한 수학자는 아니었지만 서구 문화의 미학적 정점에 놓일 만한 우주의 수학적 묘사를 창조했다.


뉴턴의 중력 법칙과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은 조화롭지 못했고, 19세기 말에는 이 두 가지 세계관이 크게 어긋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학적 인간에게 큰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문제를 숙고했고, 빛에 관해서만은 속도를 더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발광체나 관찰자가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빛의 속도는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어째서 빛은 모든 것에 대해서 항상 같은 속도로 이동하는가?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이 아니라 뉴턴에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며, 관찰자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1905년 아인슈타인이 세계에 공표한 특수상대성이론이다. 


아인슈타인 이론의 가장 놀라운 예측은 물질과 에너지가 같다는 E=mc²에 있다. 물질 알갱이 하나하나가 막강한 힘의 저장고이다. 이 예측은 1945년 히로시미와 나가사키에서 실제로 증명되었다. 뉴턴에게 공간의 절대성이란 곧 절대적 신의 존재를 의미했다. 그런 절대적 공간과 시간은 물리학자들에게 전지적 시각을 제공했다. 200년 동안 대다수 물리학자들은 그런 개념을 뒤엎는 모든 비판을 무시해왔다. 이런 종교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인슈타인같은 전폭적인 이단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물리학에 신적인 전망을 되찾아준 사람 또한 아인슈타인 자신이다. 


1907년부터 아인슈타인은 특수한 상황이 아닌 가능한 모든 일반적인 운동 상황으로 자신의 이론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중력 법칙과 상대성 이론을 통합하고자 했다. 아인슈타인은 여러 명의 정상급 수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이론은 물리학자들이 성취한 업적 중에 가장 난해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난해한 수학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일부분이라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우주가 빅뱅이라고 부르는 대대적인 특이점이 있고 물질 뿐 아니라 공간과 시간 자체도 바로 이 특이점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사건이 있은 뒤로 우주는 계속 팽창하면서 점점 커지는 동시에 식어가고 있다. 정태적이고 영원하기는커녕, 우주는 유한한 역사를 갖는 것임이 드러났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이렇게 우주의 발생이라는 개념을 과학의 한복판에 끌어들였고, 수학적 인간은 이 성서적 사건을 자신의 영역에서 마주하였다. 


그리스도교적 우주론에서 따르면, 아담과 이브가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으므로 인류는 거의 처음부터 우주의 일부였다. 그러나 일반상대론적 우주에서 인류는 150억년이나 지난 후에 나타났다. 영겁의 세월동안 존재하는 것은 원자보다 작은 입자뿐이었고, 그러다가 원자가 생겨났으며, 별이 생겨났다. 상대적 우주론에서 인류는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지 않으며, 존재의 말단에 붙은 미세한 찰나로 축소되었다. 현대 물리학이 인간의 하잘것없음을 말하는 것은 공간보다는 시간적인 견지에서다. 우주가 수억 년 동안이나 인간 없이 존재해왔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교적 자아 인식의 핵심에 치명타를 가했다.


일반상대성은 우주가 시간적으로 유한하다는 것 외에 우주가 일정한 공간적 형태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냈다. 뉴턴이 예측한 일정한 공간과 시간이 이른바 시공간으로 묶이고 물체들에 대응하여 굽어지고 휘어진다. 천체들이 운동함에 따라 시공간은 그들의 운동에 따라 고무판처럼 반응한다. 일반상대성의 궁극적 결과는 우주 전체의 형태가 그 안에 있는 물질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주의 기하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유클리드적 기하가 아니라 곡면들에 적용되는 훨씬 기이한 종류의 기하이다. 유클리드적 기하에 익숙해진 뇌로는 이 곡면들의 기하를 그려내기가 쉽지 않다. 


일반상대성은 처음부터 종교적 해석의 여지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일평생 자신의 물리학이 창조의 “신적” 계획을 규명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신과 물리학을 관련지어 생각했으며 과학이란 심오한 종교적 모색이라고 보았다. “진리와 이해에 대한 열망이 골수에 배인 자들만이 과학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의 원천은 종교의 영역에서 나온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영적 성향들을 가리켜 “우주적 종교 감정”이라고 표현했다. “모든 시대의 종교적 천재들에게 공통된 특징은 이런 종류의 종교적 감정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형상대로 상상된 신에 대한 도그마 같은 것은 없다. 이를 핵심 가르침으로 삼는 교회도 없다. 우주적 종교 감정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될 수는 없다. 내가 보기에는 이런 감정을 일깨우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 안에서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 예술과 과학의 가장 중요한 소임이다.”


“이 물질주의적 시대에 진지한 과학자들이야말로 유일하게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물리학자의 지상 과업은 우주가 순전히 거기에 따라 도출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법칙들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런 법칙들에 이르는 논리적인 방도는 없다. 오직 공감 어린 이해에 근거한 직관만이 그에 이를 수 있다. 그런 성취를 가능케 하는 감정 상태는 종교적 예배자나 사랑에 빠진 감정 상태와도 비슷하다.”


아인슈타인 사후에는 그를 성인에 버금가는 인물로 추앙하는 숭배가 시작되었다. 물리학계가 아인슈타인의 성자 같고 초탈한 듯한 이미지를 영속화하는 것은 많은 물리학자의 이상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영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의 접근을 갈망하는 시대에, 아인슈타인은 그 두 가지의 이상적인 통합을 달성한 듯 보였다. “과학 성자”로서 그는 오늘날의 세계에 물리학을 선전하는 완벽한 상징물이 된 것이다. 불행히도 아인슈타인의 이런 이미지는 왜곡된 것이다. 그는 진정한 휴머니즘과 통찰력을 지니긴 했지만 성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여성혐오적인 성향도 다분했다. “당신네 여성들로 말하자면, 당신들의 생산기관은 두뇌에 있지 않습니다.” “자연이 두뇌 없는 성性을 창조했다는 것도 있음직한 일이다.” 모두 아인슈타인이 직접 한 얘기다.


물리학계에서 여전히 내세우는 아인슈타인의 신격화된 이미지가 중요한 이유는, 그 이미지가 아인슈타인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물리학계 내에 존속하고 있는 종교성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과학 성자라는 신화는 단순히 문학적 허구가 아니라 물리학을 신성하고 거룩한 모색으로 영속화하는 강력한 문화적 이미지이다. 이 시기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담론에 주입된 유사 종교적 사고 방식은 특출난 여성들이 과학계에 진출하는 데에 큰 장애물이었다. 과학계에 축적된 남성 중심의 종교성은 보편과 진리 탐구라는 얼굴로 여전히 기세등등한 상태이며, 종교를 떼어놓고 과학이 과연 발전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의문마저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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