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홍루몽] 결말이 있어야 허무도 있다: 1226 발제2019-12-2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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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홍루뭉 111 ~ 120 발제.hwp (28.5KB)
《홍루몽》 제111회 ~ 제120회
 
임대옥의 죽음과 가보옥의 결혼 무렵부터 시작된 가씨 집안의 몰락과 연이은 죽음은 절정으로 치달아간다. 특히 보차와 보옥의 결혼을 서둘러 주도했던 두 인물, 가모와 왕희봉의 죽음이 두드러진다. 가모는 보차의 생일잔치 이후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 가모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가씨 집안은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경제적 타격을 입는다. 왕희봉은 재물과 권세를 잃고 능력을 인정받지도 못한 채 억울함에 피를 토하며 스물다섯의 나이에 죽는다.
 
왕희봉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보옥은 사람의 정해진 운명을 거론하며, 미래의 일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습인과 보차가 이런 보옥에게 면박을 준다. 앞일을 아는 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앞일을 알 수 있다는 스님(묘옥)도 납치를 당하는 마당에 앞일을 미리 아는 일이 가능하기나 하느냐는 면박이었다. 보차는 말끝에 허망하다는 표현을 쓴다. “이렇게 되는 것 자체가 허망한 일은 것을…” 인간의 운명이 허망함을 피할 수 있다면, 소설의 결말이 어찌 허망함을 피할 수 있으랴. 소설의 끝은 피할 수 없는 허망함을 향해 달려간다.
 
미래의 일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보옥의 말은 어리석다. 앎에는 때가 있다. 미리 아는 일은 소용이 없다. 앎이 소중하게 쓰이는 때는 그 앎이 필요한 순간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도, 그때가 되어야 분명해진다. 보옥은 이야기의 앞부분에서 모든 자매들의 운명과 미래를 보고 듣지 않았던가. 수많은 죽음과 고통의 순간을 겪고 난 뒤에야 보옥은 깨닫는다. 자신이 이미 운명을 알고 있었으며, 모든 운명은 허망함을 향해 달려간다는 사실을.
 
부모와 아내는 보옥에게 유가의 입신양명을 종용하지만, 애초에 스님과 도사의 힘을 빌려 인간 세상에 온 돌덩이 가보옥이 아니던가. 보옥은 점점 더 불가나 도가에 이끌린다. 옥을 되찾게 되면서 다시 한 번 태허환경을 보고 온 보옥은 자매들에게도 냉정하게 대한다. “이젠 병 따윈 나지 않아. 난 이미 마음을 굳혔는데 이따위 옥은 가져서 뭘 해!”(제117회 379쪽) 옥을 잃어서 병이 난 것이 아니라, 옥을 가졌기 때문에 병이 났다는 사실을 보옥은 알게 되었다. 부모와 아내의 곁을 떠나기 위해 보옥은 과거에 급제한 후 사라진다.
 
보옥이 과거에 급제한 일은 황제를 기쁘게 하여 가씨 집안의 몰락을 멈추게 한다. 덕분에 보차의 오빠인 설반도 풀려나 회개하고 진사은의 딸 향릉과 정식으로 부부가 된다. 보옥이 떠난 후 보차가 낳을 아이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며, 보옥과 함께 급제한 조카 역시 집안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암시를 듣는다. 인간 세상에 잠시 나왔던 돌덩이가 돌아간 후에도, 가씨 집안의 번영은 계속된다는 말이다.
 
처음 가우촌의 입에서 시작되었던 이야기는 다시 가우촌과 진사은의 대화 속에서 마무리된다. 소설의 처음에서 아직 과거도 보지 못한 가난한 선비였던 가우촌은, 이제 급제 후 여러 관직을 맡았다가 죄를 지어 관직을 삭탈당한 처지가 되었다. 가씨 집안의 일가로 묘사되는 가우촌은 이야기 속에서 간혹 스치듯 지나가는 인물이었다. 가령 가씨 집안이 몰락할 때 하인이 일가로서 도움을 요청하면, 잘 알아듣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는 인물로.
 
가씨 집안이 ‘거짓’을 의미하는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허구 혹은 이야기 자체’를 상징한다고 보면, 가씨 성을 쓰는 가우촌 역시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다. 가우촌은 이야기 속 인물이라기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혹은 만들어가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가씨 집안의 사람들과 다르다. 그렇다고 가우촌이 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관직을 맡아 공무를 보며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가우촌은 진사은의 충고나 가씨 집안 하인의 외침을 알아듣지 못한다. 이야기가 우리 삶을 매순간 장악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가우촌이 이야기에 매료되고 집중하는 시간도 삶 전체에서 보면 그리 길지는 않다. 특히 관직에 있지 않아 한가할 때가 그런 시간이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 이야기를 쓰게 된 중요한 이유가 인생의 허무를 간파하는 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모든 이야기가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인생은 허무 혹은 허망함을 향해 달려간다. 이야기가 거짓이라 해도 허망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허무 혹은 허망함은 과연 인생 자체의 ‘비어있음’을 드러내주는 말일까. 어찌해도 허망함을 피할 수 없으니 아무것도 시작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말일까.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결말이 있을 수 없고, 무언가를 바라고 움직이지 않으면 허망함도 없다. 여와가 구워놓은 돌덩이가 하늘을 메우는 데 쓰이지 못했으니, 인간 세상 구경이라도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그냥 땅바닥 위에 계속 뒹굴고 있었다면, 인생의 허망함을 깨달을 도리가 없다. 허망함은 한때라도 삶을 충실하고 충만하게 살아본 이만이 알아볼 수 있는 깨우침이다. 무대 위의 조명이 꺼지고 공연이 끝나는 순간, 원고의 마지막 문장을 막 채워 넣는 순간 찾아오는 허무는 잠시라도 삶이 충만했던 순간의 흔적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고, 시작하지 않았던 이는 이런 흔적을 알아볼 수 없다. 허무가 두려워 마지막까지 내달리지 못하는 이도 마찬가지다. 고악은 조설근이 시작했던 소설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조설근에 대한 이야기를 넣는다. 조설근은 마치 인간이 아닌 신선처럼 묘사되지만, 이야기를 끝내는 영광으로써의 허무는 고악의 몫이다. 충실한 독서에 대한 답례로 이야기의 결말을 함께한 독자인 우리 몫의 허무도 보장된다. 시작이 있어야 결말이 있고, 결말이 있어야 허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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