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명언
세미나 20200506_ 소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혹은 ‘굳이 바꿔야만 한다면’) 에레혼 조비曹丕는 시부詩賦에 교훈을 깃들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시부에 교훈을 깃들인다는 당시의 견해에 반대했습니다. 최근의 문학 관점으로 보건대 조비의 시대는 ‘문학의 자각시대’라고 부를 수 있으며, 또는 최근에 말하고 있는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의 일파와 같은 것입니다. _ 루쉰, <위진 풍도ㆍ문장과 약ㆍ술의 관계>, 1927년
유난히 감정이입을 하며 바라보게 되는 역사 속
인물들이 있다. 나에게는 위나라 문제文帝 조비가 그런
인물이다. 얼마 전 중화TV에서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가 재방영되었다. 드라마에서 조비는 아버지 조조와 달리 속 좁은 망나니로 묘사된다. 하지만
나에게 조비는 ‘까임방지권’을 획득한 인물이다. 루쉰 말대로 조비로 인해 중국에서 문학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황제로 재임했기에 지금 중문학이 독립 분과 학문으로 존재하는 것일지 모른다.) 콩깍지를 벗기고 보더라도, 조비가 문학에 대해 독특한 관점을 가진
인물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문학에 대한 조비의 생각은 그가 지은 글 <전론典論> 첫머리에 잘
나타난다. “문장이란 나라를 다스리는 큰일이며, 영원히 쇠하지 않는 성대한 사업이다.文章經國之大業不朽之盛事” 조조와 조비는 기본적으로 문文을 숭상했다. 자연스레 글재주가 사람 됨됨이를 평가하는 데에
주된 요소로 자리했다. 위나라 때에는 글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런데 조비의 글을 다시 읽어보면, 내가 그를 향해 품었던 마음이
어쩌면 오해일 수도 있겠다 생각된다. 조비가 문장을 중요하게 언급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전론>의
내용은 문학과 정치의 연관성을 부각하고 있을 뿐이다. 즉, 그가
‘불후의 성대한 사업’이라고 이야기 한 문장과 지금 흔히 말하는 문장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조비
관점에서 보면, 시부와 같은 문학 장르까지만 문장으로 취급될 것이다.
중국
문학사에서 다양한 장르를 문학으로 포섭하려는 시도는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꾸준히
하찮은 글로 취급되었다. 그나마 명 왕조에 접어들면서 소설에 대한 가치 폄하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소설을 즐기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 결정적 원인이다. 물론 <삼국지>, <수호전> 등 ‘읽을 만한’ 작품이 대거 등장한 것도 소설에 대한 평가가 뒤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에 트집을 잡으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유세명언喩世明言>을 여는 푸른 하늘
서재 주인─대다수가 풍몽룡 본인이라고 본다─이 쓴 서문에도 명나라의 상황이 여실히 묘사되고 있다. ‘우리 명나라 글은 왜 당나라 때와 같은 호방한 느낌이 없을까?’ 당시에 이런 불만 섞인 질문이 만연했고, 만만한 소설이 손가락질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풍몽룡은 이 질문을 간단한 대답으로 물리친다. 한
시대에는 그 시대에 적합한 스타일이 있을 뿐, “그러다가는 복희씨의 괘의 한 효, 한 효까지 기원을 따지고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9쪽, 서문” 풍몽룡은
특정 시대에 적합한 문체가 있다는 주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소설의 독자층도 분명히 정해져
있다고 믿었다. 소설 어투에 불만을 품은 이들에게 그는 말한다. ‘소설이 원래 그렇지.’ 소설은 통속적인 어투로 쓰여야 한다는 풍몽룡의 생각은 <유세명언>의 주된 독자층(장삼이사)를 정확히 조준하고 있다.
<유세명언>은 서술 스타일뿐만 아니라 작품의 소재도 민간 생활상을 담아내고 있다. ‘장흥가…’, ‘진 어사…’, ‘새다리장터…’ 세 편의 이야기 모두 어디선가 읽어본 듯한 이야기이다. 자칫
진부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이야기들은 오히려 당시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유세명언>에는 왕조를 뒤집고 요괴를 물리치는 영웅 대신 이야기를 읽는 자신들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작품 원문에는 지역방언도 그대로 실려있다.) <유세명언> 전반부
세 편의 이야기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풍몽룡은 사랑 이야기
800여편을 모아 <정사情史>라는 제목으로 소설집을
냈을 정도로, 이런 소재 작품의 창작 및 편집에 장기를 드러냈다. ‘장흥가…’, ‘진 어사…’, ‘새다리장터…’ 세 이야기는 또한 홍상수나 우디 앨런 영화 뺨치는 복잡한
남녀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배필인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믿음을 져버리고 결국에는 뜻하지도 않는 인연과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을 읽고 나니, 풍몽룡의 고집스러운 면모가 더 잘 보이는 듯하다. 그는 애초에 지식인 그룹에게 잘 보이기 위한 소설을 지을 마음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나라를 걱정하고 자연과 하나되려고 했던 두보와 이백의 시도 분명히 스케일이 큰
작품이지만, 이런 변화무쌍한 인간관계를 다루는 작품이야 말로 나름대로 규모 있는 작품이 아닐지. 물론
작품을 읽으면서 의아한 기분이 들 때도 많았다. ‘장흥가…’나 ‘진 어사…’처럼 결핍이 있는 사람끼리 이어지는 결말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이런 석연치 않은 마무리가 과연 해피엔딩일까 의문이 든다. 하늘의 이치가 어디
한치의 어긋남이 있으랴.
79페이지, 장흥가가
진주적삼을 다시 찾다 “아수가 노씨 댁과의 인연을 그냥 끊어버리지 말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면 아수와 못 이룬 인연을 이어 주는 것아니겠습니까?”
134페이지, 진 어사가 금비녀와 금팔찌를 꼼꼼하게
조사하다 가장 인상깊게 읽은 작품은 ‘새다리장터…’였다. 오산을
통해 ‘건수를 잡아보려는’ 한오 모녀의 모습이 오컬트 영화 속 등장인물처럼 오싹하게 느껴졌다. (인상깊게
봤던 영화 <겟 아웃>이나 <미드소마>가 떠오르기도 헀다. 이 영화에서 자신들의 세계로 이방인들을 인도하는 인물이
중요하게 나온다.) 마지막에 스님 귀신이 나오는 부분은 <홍루몽>의 귀신 소동, 귀신에 들리는 비구니 캐릭터 묘옥이 떠오르기도
했다. 앞부분
세 편의 이야기만 읽어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풍몽룡의 의도대로 ‘세상을 깨우치는[喩世]’ 작용을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단순히 권선징악 말고
더 강력한 장치가 있어야 풍몽룡의 의도대로 독자들을 계몽시킬 수 있을텐데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는
까닭은 ‘풍몽룡의 언言
시리즈’ 마지막 작품집인 <성세항언醒世恒言>의 서문 때문이다. 풍몽룡은 <성세항언> 서문에서
이전 소설집 <유세명언>과 <경세통언警世通言>의 제목을 아래처럼 풀이했다. (<유세명언>의) 명明이라 함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인도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경세통언>의) 통通이라는 것은 속된 무리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적당하게 풀어썼다는 뜻이다. 그리고 (<성세항언>의) 항恒은 그것을 익혀도 싫증이
나지 않고 오래도록 전해질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풍몽룡도 소설을 통해 민중을 교화시키려 했던 지식인에 불과했을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더라도, 백성에게 이토록 밀착한 텍스트를
조탁하는 노력은 기존 지식인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주류 지식인에 가까운 풍몽룡의 사고 방식과
비주류에 속하는 그의 작품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한다. 이 괴리를 살펴보는 일은 중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세미나를 소개하며 ‘풍몽룡 유니버스’라는 말을 급조했었다. 하지만
작품들을 읽고 나니 <유세명언> 세미나를 통해
살펴야 할 ‘세계universe’는 작품과 작가의 내면, 두 가지 차원이란 점이 분명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