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취투북] <노자가 옳았다> #4 - 덕력충만 세계정복2021-01-2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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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zziraci/474


<노자>의 다른 이름은 <도덕경>이다. 이는 <노자>의 구성 때문인데, 81장 5,000여 자의 텍스트를 상편과 하편, 혹은 상경上經과 하경下經으로 나눈다. 각각 도경道經과 덕경德經이라 하며 이를 합해 <도덕경>이라 부르는 것이다. 1장에서 37장이 도경이고, 38장에서 81장이 덕경이다.  


저자는 이를 각각 '윗벼리 길의 성경'과 '아랫벼리 얻음의 성경'으로 옮겨놓았다. 윗벼리와 아랫벼리는 각각 상경과 하경을 옮긴 말이며, 길의 성경은 도경을 얻음의 성경은 덕경을 옮긴 말이다. 저자가 앞에서 누차 언급했으며, 도道라는 글자를 보면 알 수 있듯 도경道經을 '길의 성경'이라 풀이할 수 있을 법하다. 그러나 덕경德經을 '얻음의 성경'이라 풀이할 수 있을까? 덕德과 '얻음'이 무슨 상관이길래?


도의 논의에 비하여 덕의 논의는 한 차원이 낮다. 왕필의 주석대로 "덕德"은 "득得"(얻음)이며, 개물個物이 도道로부터 얻어 자신의 몸속에 축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21쪽)


오늘날 우리말에서는 '덕德'과 '득得'을 서로 다르게 읽지만 중국어로는 발음이 같다. 전통적으로 같은 음을 취하여 글자의 뜻을 풀이하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의(義/宜), 인(仁/人), 정(政/正)과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덕德'은 곧 '얻음(德)'이며, 따라서 이는 도道라는 근원적이며 핵심적인 것을 몸소 체득하거나,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도덕경>은 도에 대한 논의, 우주론이나 존재론 같은 심오한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이를 실천하고 실현하는 덕의 이야기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마왕퇴 백서의 출현 때문인데, 여기서는 덕경이 앞서고 도경이 이어지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하듯 이런 흔적은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노자>를 풀이한 <한비자>의 <해로解老>, <유로喻老>를 볼 때 한비자가 읽은 <노자>는 <덕도경>의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왕필 시대 역시 <덕도경>의 형태였을 것이다.(323~324쪽) 혹시 왕필이 이를 <도덕경> 체제로 바꾼 건 아니었을까? 아니면 왕필 이전에 누군가 이미 백서본의 <덕도경>을 대신하여 <도덕경> 형태로 편집한 것은 아닐까. 아직까지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


과연 <노자>의 본래 모습은 어땠을까? 오늘 우리가 보는 <노자>의 모습과 똑같지는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다만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도道와 덕德 가운데 도를 중심으로 <노자>를 해석하는 것 말고 덕을 중심으로 <노자>를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노자>가 본래 <덕도경>이었다면 사실 중요한 것은 덕에 대한 논의 아니었을까?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노자>에 대한 해석이 워낙 많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모든 중국 고전이 주석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특히 <노자>의 경우 그 정도가 매우 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가 계속 언급하는 왕필의 존재가 그렇다. 왕필의 <노자주>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주석으로 꼽힌다.


왕필은 20대에 <노자>와 <주역>에 주석을 달았다. 그의 주석은 후대에 필독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형태로 텍스트를 편집했으리라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니 후대 <노자>를 읽는 사람들은 왕필의 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셈이다. 


이런 까닭에 최진석은 왕필의 해석을 넘어 <노자> 본의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자>의 다른 번역서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에서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다는 것은 왕필의 해석을 거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왕필의 주석을 많이 참고하는 저자와 최진석의 풀이를 비교하는 것도 하나의 흥미로운 접근이라 하겠다.


<덕도경>에 대한 이야기, 왕필을 둘러싼 입장 차이를 논의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편의 논의보다 하편의 논의가 좀 지지부진한 까닭이다. 실제로 저자 역시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풍부하게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처음부터 장광설을 늘어놓는 저자 도올의 문제일까? 실제로 저자의 다른 책에서도 동일한 강도로 논의를 끌어가지 못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노자> 텍스트를 해석하는 다른 책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도에 대해서는 많은 서술을 늘어놓지만 덕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가 없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노자>의 핵심 개념들도 대체로 도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이라는 논쟁적인 제목의 책을 쓴 강신주의 지적은 그런 면에서 곱씹어 들어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보았을 때 기존의 <노자> 이해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대다수 연구자들이 81개 장 전체를 동일한 비중으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강신주의 책, 25쪽)


개인적으로 도올의 <노자> 해석이 흥미로우면서도 아쉬운 것은 그 역시 이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강신주는 <노자>가 통치자를 위한 가르침이라는 점을 주장하였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은 <노자> 텍스트 곳곳에서 보이는 성인과 백성의 대립적인 구도 때문이다. 


과연 <노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일까? 저자는 "노자사상은 항상 민중의 편에 서 있었고, 통치자의 자의적 권력횡포와 무단을 제어하는 효용을 지녔다.(390쪽)"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자>에서 민중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도리어 저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치관의 한계를 엿보이기도 한다.


나는 정치가는 무심하고 코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성을 어린이로 만드는 통치기술은 정치가의 마음이 어린이 같아야 하는 것이다. (363쪽)


<노자>에서 강조되는 여성성, 아이의 표상, 부드러움, 웃음 등의 부분을 강조한 서술이다. 통치자, 즉 정치가 역시 그런 성품을 가져야 한다는 맥락. 그러나 그것이 어째서 '백성을 어린이로 만드는 통치기술'이 되는 것일까? <노자>의 일부 내용이 우민화를 주장한다는 비판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조금 조심스레 서술해야 하지 않았을까?


고대 사회에서 민民, 백성은 능동적인 존재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들은 늘 군주의 영향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존재이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는 공자의 말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라를 다스릴 때는 정법으로 하고 무력을 쓸 때는 기법으로 하라. 그러나 천하를 취하고 싶으면 무위무사로 하라!"(以正治國,以奇用兵,以無事取天下。 , 389쪽)


하편은 덕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상덕부덕上德不德", <노자>는 기존의 논의를 뒤엎고자 한다. 부덕不德, 즉 덕이 아니라고 손가락질받는 것을 숭상하며 여기에 어떤 비밀이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낄낄거리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심오한 가르침.


"하삐리 새끼들이 내가 말하는 도를 들으면 웃긴다고 깔깔거릴 거야. 그런데 그 새끼들이 깔깔대고 웃지 않는다면 내 도는 도가 될 수 없는 거야!"(337쪽)


확실히 <노자>는 소수를 위한 책이다. 이 소수는 누구일까? 세계의 보편 관념에 도전하는 이들을 위한 글일까. 아니면 어떤 이들의 비판처럼 소수의 통치자를 위한 글일까. <노자>가 이야기하는 덕德이란 무사無事이며,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는 무위無為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목적이 있다. 천하를 취한다는 거대한 비전이.

개인적으로 <노자>를 즐겨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자> 본문 곳곳에서 넘실거리는 욕망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천하를 취한다는 거대한 목표가 나와 영 동떨어져 있는 까닭이다. 


<노자>를 다시 읽을 때마다 나의 관점을 되짚어보곤 한다. <노자>를 좋아하지 않기에 찾아 읽지 않는다. 이번처럼 <노자>를 강독해야 할 때 책을 꼽아 다른 사람의 관점을 엿보는 정도이다. 도올의 노자 풀이를 보며 무릎을 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 <노자>에 대한 개인적인 관점을 정리해두었다. 읽고 나서 수정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딱히 그런 부분이 떠오르지 않는다. 관련 내용은 <노자의 맨얼굴>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zziraci.com/book/laozisumian


아무리 보아도 <노자>는 소박함과 거리가 멀다. 최근 들어 마음먹기를 내 개인과 무관한 일에 너무 많은 마음을 쏟지 않기로 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다시 <노자>를 멀리할 듯하다. 차라리 이랬다면 그나마 피식 웃고 고개를 돌려보았을 테다. 덕력충만, 세계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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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저녁 취투부에서는 흥미로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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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부터는 <달콤 살벌한 한중 관계사>를 읽습니다.

https://zziraci.com/qutubook/hzg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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