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취투북] <달콤 살벌한 한중 관계사> #3 - 친해지길 바래2021-02-23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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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중국은 멀고 먼 나라였다. 미디어에서 중국은 웃긴 나라로만 이야기되었다. '니 하마', '띵 호아'와 같은 유행어만 알 뿐이었다. 공산주의 국가라는 점도 거리감을 더했다. 인민군의 인해전술이 중국에 대해 아는 거의 전부였다.


대학 시절 중국에 대한 강의를 들었을 때 귀에 박힌 말이 있다. 오천 년 역사를 함께 했던 나라인데 고작 오십 년 떨어져 있었을 뿐이라고. 그해 여름, 창춘(장춘長春)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 지린(길림吉林)을 지나 옌지(연길延吉)까지. 투먼(도문圖門)에서 두만강 너머로 보이는 북녘 땅은 가깝고도 까마득히 먼 곳이었다. 


조선족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궁이에 불을 때어 솥에 지은 밥을 얻어먹었다. 한 번은 솥뚜껑에 달걀 프라이를 부쳐 주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백석은 <국수>에서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는데, 아마도 내가 느낀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 번은 어느 작은 현縣에서 냉면집을 발견하곤 들어가 냉면을 먹었다. 남조선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그것 하나로 반가워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백석의 시를 빌리자. <북신>에서 그는 모밀 국수에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 소수림왕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을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말과 정이 통하는 이들을 만난 경험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렇다고 민족이란 고유하고 고결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낯선 나라에 나와 말이 통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 반가웠고, 거꾸로 그들을 통해 중국을 만났다. 이념, 체제, 국가로서의 중국이 아니라 순박하고 으젓한 사람들, 어진 사람들의 터전으로 중국을 만난 게 행운이었다.


하여 나에게 중국이란 여러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나라다. 중국을 두고 이렇거니 저렇거니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아가 치밀곤 한다. 너무 단순한 생각에 짜증이 나는 것이다. 수억이 넘는 사람들이 어찌 하나의 생각을 갖고 있었겠으며, 또한 수천 년의 역사를 거치며 살을 맞대고 살아온 이력을 어찌 한 문장으로 단순하게 줄일 수 있을까.


<달콤 살벌한 한중 관계사> 마지막 부분은 현대사에서 양국 관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7장 <혐오의 시대, 연대의 기억>은 20세기 초, 이른바 개화기 시대에 한중 양국이 서로를 어떻게 혐오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른바 개화파는 중국과 같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편전쟁을 겪은 중국 꼴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로 중국에서 온 유교를 버려야 하며, 유교를 지키자 운운하는 이들을 중국으로 보내자고 까지 한다. 여기까지는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주장을 보면 모골이 송연하다.


문명개화파는 유교 경전은 중국에서 만든 책인데, 그것들이 해롭다는 것은 몰락해 가는 당시의 중국을 보면 알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유교 전통을 지키는 사람은 다 중국으로 보내버려야 한다고까지 했다. ... 더 나아가 이들은 서양화를 추구한 일본은 문명국이고, 몰락해 가는 중국은 야만국으로 인식했다. 그렇기에 이들의 눈에 청일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며, 문명국 일본이 야만국 중국에게 승리한 것으로 보였다. (181쪽)


청일전쟁을 문명국의 승리로 보았다. 그러나 이 전쟁의 결과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던가. 중국은 식민지 조선을 보며 손가락질했다. 량치챠오 <조선 멸망의 원인>은 조선처럼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양국은 서로를 혐오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피해자 동류 혐오(190쪽)였다. 가깝고 비슷하기에 더 혐오할 수밖에. 


이렇듯 개혁에 대한 열망과 절박함은 두 나라의 개혁파가 똑같았다. 그들은 서로를 개혁을 잘하지 못한 해외 사례로 인식하고, 서로의 못난 모습을 근거로 자국의 개혁을 주장한 것이다. 한마디로 '데칼코마니'였다.(188쪽)


이토록 뿌리 깊은 혐오라니! 100여 년 전 개화파들의 목소리에서 오랜 혐오의 뿌리를 발견할 수도 있지만 또한 이 동류의식은 쉽게 서로에 대한 선망으로 바뀌기도 했다. 조선은 1912년 신해혁명을 이룬 중국을 보며 감탄했고, 중국은 1919년 3.1 운동을 보고 놀랐다. 혐오와 선망은 생각보다 가깝다. 여기서 연대의 가능성을 탐구해볼 수 있을 테다.


책은 흥미롭게도 남과 북을 따로 떼어 각각 중국과 멀어지게 된 원인을 추적한다. 우리와 중국이 가까워질 수 없었던 것은 이념 갈등 때문이었다. 이념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이 아니라, 직접 총부리를 겨눈 적국이었다는 경험이 두 나라를 떼어놓았다. 


벌써 반 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에 대한 양국의 이해 차이는 분명하다. 얼마 전 언론에 올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항미원조'라는 말은 그 시각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전쟁에 참가할 때 중국인민지원군이 내건 표어는 '항미원조航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이었다. 이 말을 풀어보자면 '미국에 맞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돕고,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키자'는 뜻이다. (210쪽)


똑같은 사건도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쉽게 망각하곤 한다. 누가 보기엔 집안싸움에 쓸데없이 참견한 것이라면, 누가 보기엔 매 맞는 이를 구한 것이기도 하다. 책을 읽고 보니, 한국전쟁을 두고 중국과 말다툼을 한다면 '항미원조'에 방점을 둘 것이 아니라 '보가위국'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 자기 국가를 보고하기 위해 남의 땅에서 싸운단 말인가.


중국은 항미원조, 미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서 북조선을 도왔다고 항변하겠지만 남의 땅에서 벌인 전쟁으로 미국의 적국으로 대우받았다는 사실은 중국도 제 입맛에 따라 해석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앞으로 이와 비슷한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을까.


… 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전쟁에 참가함으로써 '적'으로서 미국과 대결할 수 있었다. 결국 전쟁은 고도의 정치 행위다. 한국전쟁을 매듭짓기 위한 2년간의 정전 협상 과정에서 중국은 미국과 협상 테이블 앞에 마주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1953년 7월 중국은 미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정전협정을 체결하며 자신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드러낼 수 있었다. (220쪽)


그렇다면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어땠을까? '피로 맺은 우의'(227)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국제 사회에 늘 우방이란 없는 법. 문화대혁명 당시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문화대혁명은 해석이 엇갈리는 역사적 사건이다. 책은 중국 역사에서 문화대혁명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느냐를 접어두고 북한과의 관계에서, 특히 양국 간에 모호한 위치에 놓인 조선족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주목한다. 


이처럼 연변의 문화대혁명은 북한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한족 중심주의를 침투•강화하는 과정이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악화된 문화대혁명 시기 북중 관계는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의 '눈치'를 보지 않게 해주었고, 북한과의 인위적 단절은 북한과 중국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던 연변 조선족의 모호한 '조국관'을 청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문화대혁명을 통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조선족이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242쪽)


조선족, 혹은 중국동포에 대한 대중의 이해는 이러한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한때는 그들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소거하고 한 핏줄임을 강조하다, 이제는 한 핏줄이기는커녕 외국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필요에 따라 우리 편이 되었나 너희 편이 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한중관계에 놓인, 거기에 북중관계까지 더한 이 복잡한 지대에서 우리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달콤 살벌한 한중 관계사>를 읽기 시작하면서 두 나라가 이웃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해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수 천년 간 이웃이었고, 인류 역사가 지속된다면 앞으로 수천 년간 이웃일 테다. 과연 우리는 친해질 수 있을까? 혐오와 오해, 비난과 멸시를 넘어 새로운 우정을 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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