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전 24회-31회] 근본없는
그 곳에도 근본 타령은 있다 에레혼
‘문 닫아 걸고 쓴 책’
작년 여름, 중국으로 갈 수 있을 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무작정
스터디 하나를 시작하게 되었다. 중국문학 스터디라는 타이틀을 걸고 시작했던 모임. 거기서 봤던 책은 전목(錢穆,
1895~1990)이라는 사람이 쓴 문학사 책이었다. 근대 중국사에 대해 알고 계신 분이라면
이 말이 좀 의아하다 여길 수가 있다. 왜냐하면 전목은 역사학의 대가이지 문학 연구자는 아니기에. 이 사람이 문학사 책도 썼구나, 하는 반응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대가는 결국 모든 방면으로 통한다는 말대로, 전목의
견해는 탁월했다. 그의 문학사 연구서는 국학대사國學大師라는 호칭에 걸맞는 안목이 돋보였다. 다만 강의록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다 보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았다. 스터디를 하면서 이런말을 자주 했던 기억이 난다. ‘신아서원━전목은
홍콩의 신아서원에서 중국 고대사, 문학 강의를 했었다━에서 이 수업 들은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을까?’ 아래 구절 같은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 중 하나였다. 《홍루몽》과 《수호전》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수호전》은 대체적인 윤곽만 잡아 표현하는 기법을 사용한 살아있는 문학으로 생동적인
연설 내용을 기록하여 정리해서 만든 작품이다. 《홍루몽》은 문을 닫아 걸고 쓴 것으로, 묘사가 대단히 섬세하지만 결코 생동적인 연설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수호전》은
사회 면모를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홍루몽》은 묘사가 매우 생동적이지만 노래가 있는 연설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홍루몽》에는 시와 사가 많이 들어있어, 노래가
있는 연설로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호전》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있다. _《전목의
중국문학사》, 뿌리와이파리, 2018, 417-418쪽 인용한 부분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 중 하나다. 대체 ‘문을
닫아 걸고 썼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홍루몽》과 관련된 여러가지 추측들이 오고 갔다. 잠정적으로는 조설근의 개인 창작이라는 말을 저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세미나에서 몇 번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가 흔히 4대기서니 명청 5대소설이니 하는 것은 《수호전》을 기점으로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야기의 구조나 문학적 가치에 대한 논의로 놓고 보면 흔히 《삼국연의》와 《서유기》를
한 그룹으로 분류하고, 나머지 《수호전》, 《금병매》, 《홍루몽》을 다른 한 그룹으로 분류한다. 예전에 이런 분류 방식에
대해 크게 공감을 하지 못했을 때, 한 선생님이 명확한 기준을 말해준 적이 있다. 앞 그룹의 책은 공유할 수 있는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이고, 뒤의 그룹 작품들은 공유할 수가 없는 작품이라는 것. 다시 말해
《삼국연의》, 《서유기》는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사람들과 함께 듣는 것에 적합하고, 《수호전》-《금병매》-《홍루몽》은
혼자서 책으로 보는 게 더 나은 작품이다. 《수호전》은 적나라해서, 《금병매》는
외설적이라, 《홍루몽》은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서. 《삼국연의》, 《서유기》는 읽지 말라고 어른들에게 꾸지람들으면 그만일테지만, 뒤
세작품들은 드러내놓고 읽기 어딘가 민망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분류 방식은 뒤의 세 작품이 등장하면서
중국 독서 시장에 붐이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무송: 살인으로 참을 인 자 셋을 면하는 중문과 전공 수업 같은 이야기를 갑작스럽게 하는 이유는, 무송전의
나머지 파트를 읽으면서 당시 독자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체감했기 때문이다. 무송 파트를 설화인에게 구연으로
들으며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을까? 반금련의 이야기와 무송의 복수극을 이야기꾼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상상은 잘 연상이 되지 않는다. 물론 사람들의 이목은 끌었을테지만, 다들
점잖은 척 하며 그런 이야기는 공개된 장소에서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반금련이 등장한 이후로, 저자는 《수호전》의 메인 테마가
무엇인지 잠시 망각한 듯 하다. 24회부터는 호형호제하는 영웅들 이야기는 잠시 뒷전으로 밀려나고 불륜과
모략이 넘실댄다. 장례를 치르는 사람마저 기절을 할 정도로━137쪽에서는
그것마저 연기였다고 무송에게 털어놓긴 하지만━무대는 참담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다. 기쁜 순간도 찰나, 반금련과 서문경을 벌벌 떨게 만드는 무송이 형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무대를
죽인 두 사람은 예정된 시나리오대로 말을 만들지만 무송의 의혹은 점차 확신으로 바뀐다. 냉기로 인해 무송은 모발이 거꾸로 섰는데 눈을 똑바로 떠서 바라보니 탁자 밑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와 소리질렀다. / “무송아, 나는 정말 비참하게 죽었다.” / 무송이 잘 들리지 않자 앞으로 다가가 다시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냉기가 없었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 ‘형님의 죽음은
석연치 않다. 방금 뭔가를 알리려 한 것 같은데 내 기가 몹시세서 영혼이 흩어지고 말았구나.’ (본문
133-134쪽) 구천을 떠도는 망자마저 기운으로 물리칠 수 있는 이 남자는 자기식대로 수사를 시작한다. 무송은 반금련, 왕 노파를 부르고 여기에 이웃사람들까지 증인으로
동원하여, ‘협박에 의한 자백’을 받아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본격적으로 무송의 복수극을 묘사한다. 무송의 분노가 작가의 어조를 앞질러버렸는지, 혹은 너무 잔인한 장면이 나와 상반된 감정이 드는 것인지. 반금련이
목숨을 잃는 장면을 보면 지금 내가 무엇을 본 것인지 얼떨떨한 기분이 든다. 작가는 서문경의 최후를
보여주며 더욱 신이 난듯 보인다. 서문경이 무송에게서 도망갈 수 없는 이유도 조목조목 설명해준다. 서문경은 첫째, 원귀가 붙었고, 둘째, 하늘이 용납할 수 없었으며, 셋째,
무송의 초인적인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본문 153쪽) 반면 작가는 무송을 숭고한 인물인 것처럼 그려낸다. 형의
죽음을 위한 처절한 복수극을 펼치고도 금새 이성을 되찾는 무송, 살인을 저지르고도 도망치지 않고 관아에 스스로
향하는 무송, 사형을 당하지 않고 유배를 떠나게 되는 무송…… 하늘도 감동한 것인지(혹은 무송을 어지간한 사람이 죽이기는 무리인 것이기 때문인지) 장청과
손이랑을 만나고서도 목숨을 잃지 않고 이들과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송강을 묘사할 때 작가가
보여줬던 성의에 비하면, 무송에 대한 시내암의 애정은 감출 수가 없나보다. 무송은 귀양지에 서조차 귀인을 만나게 된다. “의사 같이 이렇게 대단한 영웅을 누가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제 아들은 원래
쾌활림에서 장사를 하며 재물을 탐내지 않았고 정말 장대한 우리 맹주 땅에 웅대한 기상을 보탰습니다. 그러나
지금 장문신은 권세를 등에 업고 횡포를 부려 공공연히 남의 사업을 빼앗았습니다. 의사와 같은 영웅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도저히 원수를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의사께서 버리지 않고 이 잔을 깨끗하게 비우시면, 어리석은 제 아들이 형님으로 모시고 사배를 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표하고자 합니다!” (본문 193-194쪽) 이렇게 시은과 새로운 인연을 맺은 무송은 장문신의 주점으로 가서 시은의 복수를 돕는다. (여기서 무송은 본래 면모와 달리, 어쩐 일인지 장문신을 살려보낸다.) 하지만 ‘천하에 도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가만두지 않습니다’(본문 208)라는 회심의 대사가 무색하게, 30회에서는 무송에 의해 원앙루에서 살육이 펼쳐진다. 반금련과 서문경을
죽이고도 정직한 태도로 일관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살인자는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송이다'라는 글을 남겨
화를 자초한다. 관아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무송도 이 시점에서 노지심과 같은 행자 행색을 갖춘다. 무송전 31화에서 그는 공량의 집에서 위기에 처하지만 송강의
등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무송과 송강의 만남은 《수호전》의 브로맨스를 다시한번 강조하는 동시에, 이 작품이 결국 어느 방향으로 결말을 맺게 될 것인지 독자에게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듯하다. “……형님과 저야 살아도 같이 잘고 죽어도 같이 죽기로 맹세하여 괜찮다고는 하지만 화영 지채도 틀림없이 연루될 것입니다. 저는 이룡산 이외에 갈 곳이 없습니다. 하늘이 가엽게 여겨 제가
죽지 않고 언젠가 조정의 부름으로 귀순한다면 그 때 형님을 찾아뵈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 “동생이 이미 조정에 귀순할 마음이 있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울걸세.……” (본문 265쪽) 《수호전》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부분은 작품의 주인공━즉,
안티히어로들이 어떤 가치에 대항하고 누구에게 반기를 드는가 하는 점이었다. 《수호전》 등장인물들의
분노는 가까운 이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발산되지만, 그렇게 분노가 발산되고 나면 맥이 빠지는듯한 모양을
취한다. 입버릇처럼 도덕의식을 운운한다든지, 아직 도적질다운
도적질(?) 해보지도 않고서 귀순을 이야기한다든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책이 진행된다는 기분이 든다. 처음에는
홀린듯이 책장을 넘겼다면, 지금은 의아한 마음으로 《수호전》을 읽고 있다. 《수호전》이 근본없이 날뛰어주길 바랐는데. 결국 여기에서도 권선징악이니
교화니 하는 냄새가 슬슬 풍긴다. 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누구가에게
독서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채로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면 그 이유는 작품 내용이 극악무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온갖 나쁜 행동 다 해놓고 마지막에 스스로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패턴에 다소 민망함과 피로감이 밀려올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