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마오] 마오쩌둥 주요문선 제4~6부 발제 (0320)2019-03-20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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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혁명은 세계혁명의 일부분이다

  

제4부 신민주주의론, 제5부 당팔고에 반대함, 제6부 옌안 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

 

서구의 근대는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통해 이루어졌다. 봉건제가 해체되고 대공업이 발전하면서, 군주가 통치하는 시대는 점차 몰락해 갔다. 변화는 빠르지 않았고, 세계에는 여러 사회형태가 혼재되어 있었다. 왕을 살려두고 의회정치를 하는 나라도 있었고, 왕의 목을 쳐버린 나라도 있었고, 아직 왕이 통치하는 나라도 있었다. 봉건의 습속을 일찍 버린 나라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면 식민지가 된 나라는 어떻게 근대를 맞아야 할까? <신민주주의론>에 등장하는 마오의 고민지점이 여기에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은 어디로 가나?’

 

의외로 마오의 답은 확고하다. 우선 서구 열강에게 뺏긴 나라를 되찾아야 하고,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루어야 하며, 경제발전으로 성장한 자본가계급이 정치 권리를 주장하는 혁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을 착취하는 자본가계급을 몰아내는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 순서가 확실한 모델이다. 이 모델은 맑스가 보았고, 예상한 서구의 과거·현재·미래였다. 영국의 명예혁명(1688)과 산업혁명은 봉건제의 해체와 맞물리며 사회의 변화를 촉진했다. 영국과 경쟁하기 위해 미국의 독립전쟁(1775 ~ 1783)을 후원하던 프랑스 왕실이 재정 문제로 세금제도를 개편하려 하면서, 프랑스에서는 대혁명(1789)이 일어났다. 한동안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부흥이 계속되다가 과도한 경쟁으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생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사회주의와 맑스의 이론이 인기가 있었다. 마오가 내세우는 계획의 근거도 맑스에 기대어 있다. 맑스(1818 ~ 1883)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분석하면서 혁명을 예견했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혁명이 일어나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을 몰아내리라고. 제1차 세계대전(1914 ~ 1918)의 와중에 실제로 러시아에서 노동착취와 전쟁동원에 반대하는 혁명(1917)이 발생했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들이 몰아낸 것은 자본가계급이 아니라 황제였다. 프랑스혁명처럼 왕과 귀족을 몰아내는 자본가계급의 혁명이 러시아에서는 아직 없었던 탓이다.

 

그 다음 사회주의 혁명의 기운이 고취된 곳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영국이 아니라, 아직 반봉건·반식민 상태에 처해있는 중국이었다. 어딘가 맑스의 예견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아직 중국 땅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 없지만, 대장정을 거치며 넓은 대륙과도 같은 중국을 샅샅이 다녀본 당시의 마오는, 자신이 누구보다 중국의 실정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믿지 않았을까? 마오는 맑스의 이론에서 역사의 보편성을 탐색하는 동시에, 자신이 알고 있는 중국의 특수성을 새로운 혁명론으로 풀어가려고 한다. 유럽의 혁명을 본 딴 두 단계의 혁명론이다. 봉건을 타파하는 첫 단계는 민주주의 혁명, 두 번째 단계는 사회주의 혁명이다. 질적으로 다른 두 단계의 혁명이 이어져야 한다. 마오는 자본가계급이 중심이 되어야할 첫 단계의 민주주의 혁명을 ‘신민주주의’라 부른다. 두 번째 단계의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려면, 이 ‘신민주주의’ 혁명이 필요하다.

 

중국 땅을 떠나 본 적 없다고 해서 국제 정세를 판단하는 마오의 감각이 무디지는 않았다. 마오는 ‘중국혁명은 세계혁명의 일부분이다’라고 단언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중국혁명은 세계사적 사회주의혁명의 범주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오가 보기에 러시아의 10월혁명은 세계사의 방향을 바꾸었다. 스탈린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을 거치며, 민족문제는 더 이상 민주주의 혁명의 일부에 속하지 않고 사회주의 혁명에 속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마오 역시 이 주장에 동의한다. 중국혁명이 반제국주의를 내세우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혁명의 동맹에 속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중국의 운명을 세계혁명의 일부분에 속하게 만든 사건으로 마오는 5·4운동을 꼽는다.

 

마오는 5·4운동의 중심 세력을 지식인과 친자본가계급으로 상정한다. 이들은 중국에서 민족자산계급이 갖는 혁명성과 타협성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국공합작의 실패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언제든 친제국주의 세력으로 변할 수 있다. 마오는 중국이 친자본주의·친제국주의의 흐름에 편입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의 근대화에 무관심하며, 끊임없는 영토 확장과 수탈에만 열을 올리기 때문이다. 마오는 “제국주의는 사멸해가는 자본주의다”라는 레닌의 견해에 동의한다. 또 두 단계의 혁명을 불가능하게 여겨 한 단계로 통일해 버리자는 의견도 과감하게 묵살한다. 마오는 혁명과 공상을 구분할 줄 안다. 그리하여 신삼민주의가 제창된다. 소련과 연합하고, 공산당과 연합하고, 농민·노동자를 돕는 3대정책이 신삼민주의이다.

 

5·4운동에 대한 마오의 평가는 루쉰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진다. 스스로 문화에 어둡다 밝히는 마오의 문예론에는 세 페이지마다 한 번씩 루쉰이 등장한다. <당팔고에 반대함>에서는 당팔고의 대안으로 루쉰의 ‘글쓰기론’을 들고 나온다. 격식에 치우친 문장형식인 당팔고가 5·4운동의 반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마오는 주관주의와 종파주의에 빠지기 쉬우며, 아름답지 않은데다 선전의 효과도 적은 당팔고에 반대한다. 동시에 루쉰의 문장을 ‘사회주의 혁명가’의 문장으로 만들어버린다.

 

마오는 전선戰線을 문화전선과 군사전선으로 구분하며, 문화라는 군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문예종사자들의 입장문제·태도문제·사업대상문제·사업문제와 학습문제 등을 제기한다. 문예를 이런 방식으로 보는 사회주의자들의 태도는, 예술지상주의나 예술신비주의에 빠지기 쉬운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마오의 문예론은 속시원하게 문예종사자의 태도와 학습문제를 풀어간다. ‘누구를 위해 어떻게 복무할 것인가?’의 문제로.

 

<옌안 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을 마무리하며, 마오는 루쉰의 글을 인용한다. “뭇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눈 치켜뜨고 차갑게 응대하며, 머리 숙여 기꺼이 어린아이 태우는 소가 되리라” 마오는 이 시구를 좌우명 삼아 ‘어린아이’와 같은 무산계급과 인민대중의 ‘소’가 되어 온갖 정성을 다해 죽을 때까지 몸 바쳐 일하겠다 말한다. 한편 루쉰은 언젠가 <아Q정전>을 쓴 연유를 밝히며 자신이 한 마리 지친 소와 같았다고 썼다. 늙고 지친 자신을 여러 집에서 데려다 일을 시켜도 되지만, 다만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스스로 풀 뜯고 숨 쉬게 해 주어야 하며, 소를 죽여 고기를 내다 파는 일도 안 된다. 마오는 루쉰을 거리낌 없이 ‘사회주의자’라 칭하지만, 루쉰은 자신이 ‘사상계의 선구자’라 불리는 일을 얼마나 끔찍스럽게 여겼던가. 과연 혁명이 누군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일일까. 어쩌면 혁명은 무산계급을 ‘어린아이’로 보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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