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주권과 순수성 제 6장 - 누가 향토를 논하는가2021-07-06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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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향토를 논하는가

에레혼

 

한겨울이었다.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날씨는 음산하고 찬바람이 윙윙 배 안을 파고 들었다. 덮개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 누릿한 하늘 아래 스산하고 황량한 마을들이 띄엄띄엄 생기 없이 늘어서 있었다. 가슴에 울컥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 이게 내가 이십여 년 동안 한시도 잊지 못하던 고향이란 말인가?

내 기억속의 고향은 이렇지 않았다. 그건 훨씬 더 근사했다. 그러나 기억속의 그 아름다움을 떠올려 멋진 대목을 말하려 하면 영상도 사라지고 언어도 사라져 버린다. 마치 그런 것이라는 듯. 그래서 나 스스로 이렇게 해명하는 것이다. 고향도 본시 그렇다. 진보가 없다 한들 슬픔을 느낀 이유는 없다. 그저 내 심정의 변화일 뿐이니까. 게다가 이번 귀향에 설렘 같은 게 있지도 않았으니까.

루쉰, <고향>, 《루쉰 문학선》, 엑스북스, 2018[1]

 

 

향토, 고향, 농촌, 토착. 보는 것만으로도 흙냄새가 나고 전원 풍경이 떠오르는 단어들. 프래신짓트 두아라는 한 번 더 성역을 건드린다. ≪주권과 순수성≫의 모든 파트가 그러했듯이, 향토는 으레 순수함을 담아야 하는 키워드이다. 시골은 정말 순수한 곳인가, 혹은 농촌 개발에는 어떤 의도가 도사리고 있는가 따위의 질문은 거센 비판을 불러일으키기 일쑤이다. 교육과정에서는 전원 생활을 잘 묘사한 현대 소설을 그 자체로 현실주의적이자 계몽주의적 이상을 동시에 구체화해낸 작품이라고 추켜세운다. 이런 학습 방식에서 묘한 불쾌감을 느꼈지만, 거기에 함부로 문제제기를 할 수는 없었다.

불쾌함의 기원은 다시 번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아라는 아시아에서 향토라는 개념이 어떻게 학문 중심으로 파고들었는지 천착한다. 그 과정에서 독일어 하이맛Heimat향토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383) 저자가 개념 형성의 전후 맥락을 전부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유럽 제국주의의 후발주자 독일은 유독 향토에 관심이 많았다. 6장에서 주된 논의 대상인 향토 예술도 독일어 하이맛쿤스트Heimatkunst를 일본어로 번역한 결과이다.[2] 제국주의 선발주자들에게 공장지대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광활한 토양이 있다! 향토에 대한 강조는 태생부터 민족주의적인 반응이었다. 이 개념은 아시아로 굴절되어 유입되었음에도 원산국의 뉘앙스를 완전히 털어버리지 못했다. 일에서 번역된 향토 개념은 민족주의적 성격이 더욱 강화되는 방향으로 굴절되었다.

서구의 학문 개념 유입에 민감하게 반응한 집단은 (이번에도 역시)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중국 지식인들이었다. ≪주권과 순수성≫에서는 루쉰우쭈어런 형제를 향토 개념에 대한 선각자로 언급한다. 조우쭈어런은 동시대 지식인들처럼 전통 사상의 원시성을 공격하는 차원에서 향토라는 개념을 인용하는 수준에 그친다.(375) 그러나 그는 이후에 향토를 도교샤머니즘 등의 민간 문화를 유교적 구습의 대안으로 보았다.(376) 이는 향토를 전통이나 역사로 다듬는(377) 작업이었으며, 지방을 교화 대상으로 본 명말청초 지식인들의 사고방식과 유사성을 보인다.(373)[3]

루쉰은 이론가이면서 소설가였다는 점에서 조우쭈어런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향토에 대해 언급할 때에도 루쉰은 작품을 통해 이야기했으며, 다음의 평가는 루쉰의 향토 작품들에 나타나는 지배적 정서를 대변한다. <시골 연극>은 실제로 기억의 속임수에 관한 것이다. 성년이 된 화자는 어릴 때 보러갔던 노천의 시골 연극을 좋아했음을 기억한다. 그런데 그가 정말로 즐긴 것은 연극이 아니라, 시골 사촌들과 야외로 나간 모험이었음이 드러난다.(389) 루쉰의 작품들 속에서 (자신의 고향인 샤오싱을 배경으로 재구성했으리라 추정되는) 고향은 기대감과 달리 거리감이 느껴지는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두아라는 이러한 루쉰의 글쓰기를 향토의 추억과 애도(391)라고 집약한다. , 조우쭈어런이 향토 개념을 통해 유구한 역사를 만들려했다면, 루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소설을 통한 상상적 공동체를 구축하는 작업에 나선 셈이다. 루쉰은 상상의 민족 공동체를 더 폭넓게 구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관방의 문학과 구분되는―지방 문학을 강조했다.

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향토문학 작가는 량샨띵이다. 량샨띵이 중국 문학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입지가 그렇게 결정적이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아라의 서술은 의아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1) 량샨띵이 향토 문학가라고 불리기에 적합한 출신이라는 점 2) 그의 소설이 만주국의 일본 지식인들에게 모범적인 향토 문학으로 인정받았다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만주국 통치자들은 그의 작품을 검열하였는데, 《녹색의 골짜기》가 두아라가 지적하는 것처럼 자본(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공동체 간의 갈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404)

주인공 린쌰오비아오는 기득권으로 자신의 출신 성분을 혐오하지만, 아랫마을 소작인들에게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 (395쪽의 쌰오리엔에 대한 태도) 마적단에게 납치를 당하는 등 일련의 사건을 겪은 뒤 쌰오비아오는 자신이 태어난 마을로 돌아가 소작인들에게 재산을 분배한다. 《녹색의 골짜기》는 향토문학의 전형적 요소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의 작품/만주에서 활동하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중국 공산당에게 비판받았다. 하지만 스토리 상의 구조를 보면, 《녹색의 골짜기》에는 주인공이 공산주의에 경도된다는 설정이 부재할 뿐이다. 아마도 량샨띵 문학의 같지만 다른 요소들이 공산당에게 비판거리로 남았으리라. 브르주아 지주 계급에 맞서는 농민에 대한 묘사가 부재한다는 지적에 대해 량샨띵은 당시 만주에 공산당이 없었다는 알리바이(404)를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량샨띵이 알리바이를 마련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을 감화시키는 인물이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이 아니라 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북 지방에서 비적질은 청 왕조를 건설하는 데에, 군벌로 자수성가 하는 데에, 심지어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데에 적극 활용되었다. 두아라는 《녹색의 골짜기》에서 주인공이 비적에게 느끼는 동경에 대해 (마오도 즐겨 읽었던) 《수호전》을 빗댄다.(419) 《수호전》 속 비적의 이미지는 막무가내이지만 국가에 보탬이 된다는 이유로―때로는 국가가 하지 않는 정의를 수호한다는 이유로 여러 독자층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그런데 20세기 지식인들은 《수호전》류 소설들이 계몽, 혹은 사회 변혁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겼다. (문예 창작 지침을 마련했던 마오 역시 정치를 위해 종사하는 문학을 운운했으니 이런 지식인들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았다.) 비적에게 감화받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녹색의 골짜기》는 중국 현대 문학에서 예외적인 작품이며, 또한 불경스러운 작품일 수밖에 없다.

《녹색의 골짜기》에 대한 오독은 동북 지역에 대한 이해가 (의도적으로) 부재한 상태에서 발생했다. 낭만적인 비적 이미지는 량샨띵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많은 동북작가군 사이에서 공유되어온 이미지였다. 《주권과 순수성》에서 인용된 문장을 빌리자면, 만주의 초가을에는 한 순간에 농부가 비적으로 바뀌는 일종의 마술 같은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간단한 마음 바꿔먹기 같았다―하루는 고생하는 농부이다가, 다음날에는 강도로 말이다.(417) 이처럼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성립된 갈등 관계를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문예 비평 방식으로 보면, 《녹색의 골짜기》는 가치없는 문학처럼 변한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동북 지역의 대삼림을 두고 모성 타령하는 이 작품이 얼마나 전형적인가를 두고 논쟁이 일어날 법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량샨띵은 중국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 작가에 속한다.

6장의 마무리 부분에서는 신중국 수립 이후에도 동북 지역은 분쟁지역처럼 취급되었음을 지적한다. 동북은 일본이 지배했던 지역이며, 소련의 자본이 투입되어 개발될 수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 대륙의 패권을 잡은 이후에도 공산당은 동북 지역이 명청 교체기 때처럼, 혹은 20세기 초반처럼 예외적인 공간으로 변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주목할 점은 량샨띵처럼 동북 지역에 남아 작품을 쓴 사람들에게는 윤함구(淪陷區) 작가라는 이름이 붙은 반면, 동북작가군이라는 명칭은 일제의 만주국 점령 이후 동북을 떠난 이들에게 붙여졌다는 사실이다. 루쉰과 조우쭈어런도 베이징상하이와 같은 대도시를 기반으로 활동한 시골 출신 작가들이었다. 90년대에 뿌리찾기 문학(심근尋根 문학)을 제창하며 농촌의 이야기를 썼던 한사오궁도 문혁시기 하방 경험을 소설에 담은 작가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열거하니 자연스레 불경스러운 질문이 이어진다. 누가 향토문학을 전유하였는가? 그러한 전유에는 어떤 속셈이 담겨있는가? 토착이라는 개념은 민족 공동체 건설을 위해 철저하게 이용되었을 뿐이다. 향토 문학이라 이름 붙은 것 가운데 토착민의 현실적 삶을 묘사한 작품은 없다. 장르로 자리잡은 향토 문학은 도시에 없는 향수를 그리워 하는 문학이며 향토를 이용하려는 문학일 따름이다.



[1] 루쉰은 고향을 발표하기 약 2년 전인 1919 12월에 샤오싱 고향집을 처분하고, 가족 모두를 베이징으로 이사 보낸다.

[2] 이윤희, 20세기 초 동아시아 향토 개념과 중국작가의 향토 의식, 동아문화 52, 2014.11, 144-145.

[3] 공교롭게도 조우쭈어런의 문학적 관심도 명말 청초에 있었다. 그는 명나라 말기 문인들의 글쓰기 스타일을 동경하였고, 명말 소품문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소소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산문을 자주 창작하였다. 조우쭈어런의 창작 경향은 동시대 지식인들로부터 정치 의식이 담겨있지 않은 스타일이라고 비난받았다. 정작 조우쭈어런 본인은 명말청초의 문학적 변혁―개인의 개성에 관심을 두고 교화적 구호를 작품에 담지 않는 사상적 격변이 1919년 신문화 운동의 정신과 유사하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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