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이단의 글, 불멸의 글2022-08-11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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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글, 불멸의 글

에레혼

이단과 아류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역사 속에서 언제나 정통은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고, 모난 돌 역할을 했던 인물들은 괜히 도드라져 보인다. 하지만 이런 ‘아웃라이어’를 기준으로 한 시대를 바라보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평균을 벗어나는 인물을 통해 파악한 시대는 임의적으로 재구성된 가성의 공간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 평균 범주를 벗어나는 역사 인물에 대해 후대인의 평가가 중첩될 경우, 그 인물에 접근하는 일은 더욱 조심스러운 태도를 요구한다. 대체로 아웃라이어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는, 그러한 의미를 담아내는 주체의 바람이 담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단, 아류, 모난 돌, 아웃라이어… 이 모든 말은 《분서》의 저자 이탁오와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이탁오의 행보는 중국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갈증 해소의 역할을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몸담았던 명나라는 어떤 시대인가? 이 왕조를 집약하는 평가로는 보수적인 시대, 사상 없는 시대 등 부정적인 말을 떠올릴 수 있다. ‘꽉 막힌 명나라’를 대변하는 요소로는 과거 제도를 꼽을 수 있다. 이후 《분서》에서도 여러 번 등장하겠지만, 명나라 과거 시험의 문체인 ‘팔고문(혹은 시문)’은 이 왕조가 몰락의 길을 걷도록 만든 원흉으로 취급되었다. 명대의 한 학자는 ‘역대 가장 오래된 과거 시험도 100년 정도를 유지했는데, 우리 왕조에서는 한 과목을 300년 동안 유지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명나라의 폐단을 언급하면서 과거 제도로 이야기가 지나치게 치우친 듯하다. 그러나 명대의 과거 제도는 이 왕조의 통치가 굳건한 상태로 오래 유지되었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 자료 중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은 명나라가 지나치게 보수화되었음에 포커스를 맞추지만, 이 왕조가 구축한 관료제와 인재 등용 방식 등이 안정적이었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명나라의 제도가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이런 문제적 국가가 270여년이나 존속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언급해야만 한다. 명나라에서 주류 제도와 맞서는 행보를 거듭한 인물들이 주목을 받는 현상은, 고리타분한 시대에서 희망적인 부분을 발견하려는 욕망의 발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즉 명나라는 시스템적으로 안정된 왕조였으며, 이탁오는 이 시스템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던 사람이다. 이러한 의문은 위정자와 지식 계층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내용이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탁오가 기존 질서를 뒤엎기 위해서 반역을 저지른 것이라 해석하지만, 그의 글을 읽어보면 그런 원대한 야망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분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탁오의 모습은 반대를 위한 반대처럼 보인다. 진보적 지식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들도 이탁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판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이탁오와 그의 동료들은 양명학을 존숭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상에 대한 자세한 해석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지식인들 사이에서 양명학은 보수적이었던 당시 사회의 돌파구처럼 받아들여졌다. 주자학을 만들어낸 주희와 다른 방식으로 공자와 맹자를 해석하겠다는 왕양명의 야심은, 제자들에 의해 명나라의 주류 학문으로 자리잡았다. 기존의 주자학이 표준적인 가치관을 통해 자기를 수양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양명학은 ‘내 마음이 곧 진리’라는 단순한 주장을 통해 개별 백성들에게 상대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을 제시한 사상이었다.

이러한 왕양명의 사상을 더욱 극단으로 밀고 간 인물이 이탁오였다. 《분서》와 함께 이탁오의 주요 저작이라고 평가받는 《장서》에서, 그는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사람의 옳고 그름에는 처음부터 정해진 바탕이 없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도 역시 정해진 논의는 없다. 정해진 바탕이 없다는 말인 즉, 이것이 옳고 저것은 틀리다고 하는 상황이 공존할 수 있으면서도 서로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정해진 논의가 없다는 것인 즉, 이것이 옳다 하고 저것이 틀리다고 하는 상황이 공존하면서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시비를 따지는 표준을 나 이탁오 한 명의 시비판단이라고 해도 가능한 논의이며, 오래 전 역사 속 대 현인의 시비판단이라고 해도 역시 가능한 논의이다.(<장서세기열전총목전론藏書世紀列傳總目前論>)

이러한 주장은 이탁오의 사상을 전적으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인용문에서 주된 표현만 남긴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애초에 정해진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준을 세우는 존재는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다.’ 이는 인간 개개인의 마음에 진리가 있다는 왕양명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는 주장이다. 아무리 왕양명이 주자학의 대안적 사상을 내놓은 인물이라 한들, 그는 결국 선하고 순수한 가치를 중요시했다. 또한 기존의 양명학에서는 이 선한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잘 확충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관심을 두었다. 이탁오는 주류 양명학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한 셈이다. 선하면서도 순수하다는 그것이 진짜로 그렇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굳이 수양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이탁오는 이렇게 극단으로 향하며 진보적 지식 계층 사이에서도 외톨이가 되었다.

사안의 근본을 흔드는 악취미(?)는 이탁오를 괴팍한 노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태도는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탁오의 문장을 찾는 이유가 되었다. 《분서》 속에는 수많은 편지가 실려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논의에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기존 상식을 비트는 이탁오의 화법을 마주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역시 스스로 자신의 이 생에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나는 그가 어떻게 스스로 이 세상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설 수 없다면 스스로 편안히 여길 수도 없다. 스스로 편안히 여길 수 없으면, 집에 있을 때는 집을 편안히 여기지 못하고, 마을에 있을 때는 마을을 편안히 여기지 못하고, 조정에 있을 때는 조정을 편안히 여기지 못한다. (p.5_<주서암에게 답하다>)

“지리멸렬한 것과 간단명료한 것의 구분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밝게 살펴 진공(眞空)을 얻으면 ‘인과 의의 길을 따르는 것[由仁義行]이 되고, 밝게 살피지 않으면 ‘인과 의를 행하는 것’[行仁義]이 되어, 지리멸렬한 쪽으로 빠지고도 자신은 깨닫지 못합니다. (p.18_<등석양에게 답하다>)

<주서암에게 답하다>에서 이탁오는 부처가 되기 위한 전제로 이런 저런 조건을 내세운 논적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 있다. 이탁오의 주장은 결국 사람이라면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한 마디로 요약 가능하다. 논의의 세부적인 사안은 다르더라도 <등석양에게 답하다>에서도 이탁오는 비슷한 형태의 논의를 펼치고 있다. 결국 이탁오가 중요시하는 것은 구태여 무엇인가 행하려 하지 않는 상태인 ‘진공’의 경지이다.

이러한 주장이 이탁오가 불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탁오가 상대적 가치를 긍정적으로 여기고, 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과도해 보일 정도로 당대 지식인들과 설전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도()나 진리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부작위’라는 주장은 지식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이상 쉽게 내뱉을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이탁오의 사상은 권력 중심부를 꿈꾸는 사람이나 자신만의 사상적 체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도 이탁오의 글을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는 유사점으로는 격양된 감정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탁오는 자신의 감정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글쓰기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감정을 담아서 작성된 글들을 좋아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은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고분>(孤憤)은 성현이 발분(發憤)하여 지은 것이다’라고 했다. 예로부터 성현들은 발분하지 않으면 저술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발분하지 않았는데 저술을 하는 것은 마치 춥지도 않은데 떠는 것과 같고 병도 없는데 신음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비록 저술을 한다 해도 무슨 볼 것이 있겠는가?(p.11_<충의수호전서>)

이탁오가 작문을 하는 동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발분’이다. 이 단어에서 ‘분憤’이란 마음으로 통하고자 하지만 얻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주희의 주석) 이탁오가 생각하기에 명문이란 결핍된 상황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탁오의 문장관을 살펴보면, 당시 어떤 이들이 그의 문장에 공감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들이 이탁오를 이단으로 비판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탁오의 취향은 그를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남게 만들었지만, 덕분에 독자들은 《분서》에서 진솔한 감정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탁오가 <충의수호전서>에서 인용한 사마천의 글을 언급하면서 발제문을 마무리하려 한다. 사마천은 《사기》의 <태사공자서>에서 성인이나 유명한 인물들이 곤란한 상황에 처한 뒤에 명작을 지은 사례를 늘어 놓는다. 여기서 이탁오가 인용한 한비자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인데, <태사공자서>의 해당 구절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 성인들은 모두 마음에 맺힌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도리를 드러내지 못했다. 그래서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다가올 것을 고려했던 것이다.” 스스로의 저작을 태워버려야 할 책이라고 이름 지었으나, 이탁오 역시 사마천이 그랬듯 자신의 참 뜻을 알아줄 후대의 누군가가 책을 펼쳐 주기를 바랐다. 앞으로의 세미나는 이단이라 손가락질 받던 이탁오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를 발견하는 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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