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경계에서 아슬아슬 곡예를 하고있는 이탁오2022-08-18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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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불어두 번째 시간 2022.08.18. 손미경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하고 있는 이탁오

 

그가 자신에 대해 말하길 나이 오십 이전까지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 라고 < 성인의 가르침에 대해 >에서 말했다.

자신을 개에 비유한 그의 말은 가슴을 저리게 한다. 물론 더 한 말도 있기는 하지만.

50까지 그의 삶은 30여 년 동안 관직에서 기존 성현의 말씀대로 그 도를 나름 실현했다고 여기면서 부끄럼 없는 관리로서 살아왔다고 한다. 그런 그가 노년에 들어 다시 도의 길을 물었을 때 기존 성현의 가르침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닫고 불경에서 그 돌파구를 찾는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그 세계로 직진하기보다 한발만 걸친 체 경계선에서 재가 불자로서 공자의 도를 재해석하는 태도를 취한다. 완전한 전향이 아니라 도구로서 불경을 취하는 아슬아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발 딛고 있는 당시 세상은 성현의 말씀으로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그에게 너무 많은 의심을 품게 하였다. 그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으며 불경은 그에게 기꺼이 도구가 되었다.

어쩌면 < 다시 등석양에게>에서 말했듯이

도를 아직 깨닫지 못해 마음 한구석에 항상 번민과 우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관직을 버리고 초에 들어와 지식을 모시고 조금이라도 도를 깨닫고 싶었습니다. 이 모두는 오랫동안 미망에 빠져 있던 사람이 늙어서 비로서 깨달은 것으로, 결코 스스로를 인륜의 밖으로 버린 적은 없습니다.”

이런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가 진정한 유학자가 아니라 사이비라는 세간의 의심을 무마 시킬 수 없었다.

그에게서 우리가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느끼는 불안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편지 곳곳에서 저자의 불안함이 드러나고 있는데

< 초의원에게 답하다> 편에서 자신의 저서를 분서라 지은 설명에서 드러나듯이 스스로 사람들이 괴이하고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하였다.

당대 이든 후대 사람이든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혹 어떤 형태로 오해받을지 미리 예단할 필요가 없었다. 조금 더 담대한 태도가 필요했을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인정의 목마름이나 타인들의 무지와 모함에서 저자가 받았을 억울함이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벌레로 자신을 비하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은 저자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재단하지 말아야 했고 이탁오는 그런 세간의 평에 고통 받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무지한 세상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방법은 장자 만큼 담대하지도 못했고 유학자로서 치밀하지도 못했다벌레 세 마리와 같은 우언으로는 절대로 세상 사람들의 이해를 얻지 못 할 것이다.

    허나 그는 경계에 있었다고는 하나 그 본성은 유학자. 이치에 맞지 않는 세상을 향해 싸움을 걸 수밖에 없을 터이다.

다시 등석양에게에서 밝혔듯이

학문이 정말 잘못 되었다면, 마땅히 천하 후세에 그 악함을 드러내서 천하 후세가 함께 그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요, 옳다면 반드시 그 가르침을 드러내서 함께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을 추구하는 군자의 마음 씀씀이요, 대동을 이루는 길입니다.”

저자는 세속을 등지는 대신 세상에 맞서 싸움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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