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어떤 이름으로, 어떻게 기억되는가2022-08-25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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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름으로, 어떻게 기억되는가

에레혼

 

처신에 대한 고민은 난세에 처한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굴원이라는 중국 시인은 유명한 시구를 남겼다.

굴원이 말했다.
“세상이 다 탁한데 나 혼자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혼자서 깨어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쫓겨났습니다.
어부가 말했다.
“성인은 만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따라 변하여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혼탁하다면 왜 당신은 썩은 물을 더욱 어지럽게 하고 탁한 물결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취했다면 왜 함께 술지게미를 먹고 그 거른 술을 마시지는 않습니까?_<어부사>

<어부사> 속의 굴원은 고고한 인물이다. 탁하고 취한 세상은 그가 몸담았던 전국시대를 대변하는 말이다. 굴원은 이런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려 한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어부는 굴원의 고민을 간단하게 받아 넘긴다.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으면 그만큼 피곤한 일이 없다. 그리고 흐트러진 세상에 자연스레 휩쓸린다면 근심할 필요도 없다.

전국시대나 위진남북조 시기는 혼탁함과 취기로 충만한 때이다. 이런 시대에는 기이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넘쳐난다. 그런데 이렇게 기이한 행동을 한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이들은 정작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그다지 튀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전국시대나 위진시대에는 왕조 교체가 잦고 전쟁이 자주 일어났으니 ‘반쯤 취한 상태로 사는’ 사람들은 시대와 불화하지 않을 수 있었다. 결국 이런 시대에 괴로움을 느끼는 인물은 굴원처럼 남다른 감수성을 가진 이들이었다.

《분서》에도 난세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전국 시대와 위진 시기에 대한 이야기, 《수호전》의 배경이 되었던 송나라 말기 등은 이탁오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던 때이다. 아마도 그는 난세의 에너지를 동경한 인물이었을 터. 정작 이탁오가 몸담았던 명나라는 역동성과는 거리가 먼 국가였다. 명조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동원되는 보수성, 경직성, 관료주의 등의 키워드만 보아도 이 시대의 분위기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혹자는 이탁오의 사상에는 현실 정치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이단을 자처했던 이들이 현실을 뒤엎어버리기에 명나라는 이미 빈틈없이 설계된 태엽장치와 같았다.

물론 명조에 정면으로 맞서는 인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방효유라는 명나라 초기 유학자를 예시로 살펴보자. 그는 영락제가 조카 건문제의 황위를 찬탈하자, 이에 정면으로 대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영락제가 구족(본인의 항렬과 위아래로 4세대에 걸친 친족)을 멸하겠다고 하자, 십족을 참한다 해도 황제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되받아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형에 처한 이는 900여 명으로 알려졌다. 이 명단에는 방효유의 친족뿐만 아니라 스승과 제자까지 포함되었다고 한다. 명대 중후기인 이탁오의 시대에도 (방효유만큼 극단적인 방식은 아니더라도) 황제 또는 권력자와 대립하는 인물들이 존재했다. 이탁오가 《분서》에서 존경심과 안타까움을 담아 변호하는 인물 하심은도 당시 권력층과 대립했던 인물 중 하나이다.

하심은이 투옥되어 명을 달리한 이후, 이탁오는 <하심은을 논한다>를 지었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 글에서 하심은에 대한 한정된 정보만을 얻을 수 있다. 하심은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가이탁오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상술하지 않는다. <하심은을 논한다>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바는 하심은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이들이 그가 오륜 가운데 네 가지를 저버린 자라고 평가했다는 점이다.

하심은이 명대 사회에 가져온 파장에 대해서는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아래의 글을 살펴보자.

명·청시기 일부 ‘이단’ 학자들은 종법 관계를 초월하여 새로운 사회 집단을 구축하고자 했다. 명나라 태주(泰州)학파의 후학인 저명한 학자 하심은(何心隱, 1517- 1579)이 제창한 ‘회()’가 바로 그런 사회 집단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회’는 가족을 초월한 스승과 벗의 관계를 기초로 하여 스승으로 묶어지고 벗을 극치로 심았다. 하심은은 “사귐의 극치는 벗에 있다.”고 생각했다. 기타 각종 사회관계 예컨대 형제·부부·부자·군신 사이는 사귀면서 비교하고, 사귀면서 친밀해지고, 사귀면서 능멸하고 이끌어주는 등 모두 정상적이지 않으며, 단지 ‘여덟 식구의 세상[형제·부부·부자·군신]’일 뿐이다. 친구 사이의 교제만이 ‘사귐의 최고’이고 사회관계의 극치이며, 스승은 ‘도의 극치’이고 ‘학문의 극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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궈잉더, 《중국 고대 문인 집단과 문학 풍모》, 137.

태주학파는 양명학의 후대 학파 중 가장 급진적인 갈래이며, 이탁오도 이 집단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이들이 구성한 결사체 ‘회’는 현대의 학문 공동체와 유사하다. 이 집단이 구성원간의 유대나 모임을 강조했다 해서, 하심은이나 이탁오 같은 인물들이 학파의 강령을 내세웠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심은이 인륜을 경시했다는 당대인들의 비판은 《분서》의 여러 글에서 이탁오가 보였던 태도들을 연상시킨다. 이탁오의 주변인들도 그가 인륜을 방기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언급했으며 이탁오는 이 문제에 대해 인륜에 대한 색다른 해석으로 맞섰던 인물 아니었던가.

하심은이 단순히 집단의 세를 불린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사회에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이탁오의 글에 따르면 그는 당시 재상 장거정의 심기를 거슬렀으며, 이로 인해 화를 입게 된다. 장거정은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스승이자 황제를 보필했던 재상이기도 하다. 그는 아홉 살의 나이로 황제가 된 만력제의 통치를 보좌했던 인물이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그가 권력을 전횡한 간신처럼 비춰질 수 있는데, 장거정은 명나라를 유교왕조로 재건하려는 꿈을 가진 인물이었다. 한림원 학사 출신이었던 장거정은 황제에게 매우 엄격한 경전과 역사서 공부를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생원들이 읽어야 하는 유교 경전의 목록을 지정하기도 했다.

장거정은 ‘경전 공부→과거 급제→출사’로 이어지는 유가 지식인의 전형적 삶을 산 사람이다. 그를 중국 역사에서 가장 높은 관직에 올랐던 유학자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렇게 성공한 유학자에게 하심은의 학문관은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들 투성이였다. 하심은을 비롯한 태주학파는 ‘회’에서 벌어지는 강연과 토론을 기반으로 자신들만의 수양 방식을 구축했다. 또한 하심은은 강학이 비로소 공자의 철학을 가장 잘 실천하는 방법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장거정이 ‘필독 경전’ 목록을 발표한 때가 1575년이며, 하심은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진 시기는 1576년이다. 하심은에게 체포령이 떨어진 이유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하심은이 관료 집단으로부터 문제적 인물로 지정된 까닭에 대해서는 추측만이 가능하다. 먼저 양명학의 후학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불가도가의 도리와 크게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주류 유학자들이 보기에 이단학설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장거정을 비롯한 조정의 문인 관료들은 단순히 이단을 경계한 것을 넘어서, 당대의 야학이나 지방 서원 자체를 역시 문제로 여겼다. 실제로 장거정은 1579년에 서원을 철폐하는 법령을 반포하기도 했다.

<하심은을 논한다>에서 이탁오는 하심은의 최후를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이러한 안타까움에는 단순한 동정에서 그치지 않는, 독특한 정서가 느껴진다.

결국 공 역시 불행하게도 도를 위하여 죽었다. 세상 사람들은 충효(忠孝)와 절의(節義)를 위해서 죽는 일이 있다. 이로 인해 죽어서도 그 이름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태산(泰山)보다 무거운 죽음’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했다. 도는 본래 이름이 없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죽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제 공은 죽었다. 나는 공이 죽은 이후 끝내 그 이름이 인멸되어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될까 염려된다. _본문 67-68

이탁오의 생각에 도는 높은 차원의 가치가 아니며, 고된 수양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분서》의 여러 글에서 반복적으로 서술되지만 ‘당신 안에 도가 존재하고 있다’고 누군가가 귀띔해 주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도이다. 하심은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가 도의 순교자라도 되는 듯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탁오는 하심은이 대단한 도(‘공자의 도’나 ‘유학 본연의 가치’)를 위해 죽은 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주류 역사서는 충효나 절의를 위해 목숨을 끊은 이를 기릴 뿐이다. '기껏해야 도 따위를 추구한' 이들이 역사책에 이름을 올릴 가능성은 낮다. 그러니 불살라야 할 책에라도 심은의 이름을 올려 진면목을 밝히겠다! 그 또한 자신처럼 평탄한 시대에 태어난 모난 돌이었기에. 이탁오는 하심은의 생애를 보며 스스로의 운명을 직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탁오의 삶, 그리고 이탁오가 애정을 표했던 인물들의 삶을 보면서 굴원의 <어부사>를 다시 떠올린다. 하심은과 이탁오 같은 이가 안온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어땠을까. 이러한 가정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들이 명나라의 인물들이 아니라면 괴짜라고 손가락질 받을 이유도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심은이 죽음으로 이름을 드높이려 한 인물이 아니라고 절절하게 이야기하는 이탁오의 모습이 자꾸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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