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동아시아] 평등과 차별을 동시에 원한다 (<쌀 재난 국가> 발제)2023-07-13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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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재난 국가3장 코로나 팬데믹과 벼농사 체제, 4장 벼농사 체제와 불평등의 정치심리학-왜 한국인들은 불평등에 민감한가

 

이 책을 읽으며 어쩐지 지난날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왜 날이 갈수록 조직 생활은 버겁고, 인간관계는 자꾸 좁아지기만 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우리 사회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박자에 맞춰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주로 탓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럭저럭 박자에 맞춰 잘 움직이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패배했거나 동떨어져 살아간다는 느낌은 온전히 내 몫이었고, 타인과 공유할 만한 무엇은 아니었다.

 

왜인지 모르게 배신감이 드는 순간들도 있었다. 문제없이 적응하며 경력을 쌓고 살아가는 듯 보였던 이들이 갑자기 괴로움을 토로할 때라던가. 그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고 입을 모았다. 그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비롯한 각종 심리적 질환과 스트레스로 인한 자가면역질환의 이름이 그들의 입에서 쏟아졌다. 그들의 화려했던 삶만큼 그 삶의 이면에서 발견된 질환들도 주목을 받았다.

 

질환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성실하게 조직 생활을 계속했다. 나의 소극적인 태도나 게으름은 그들의 성실함이나 진취적인 태도와 비교해 두드러졌다. 나는 일찌감치 입신양명의 길을 포기했다. 입신양명의 길은 혹독한 경쟁 체제에서만 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성실하고 진취적이어서 일찌감치 내가 입신양명을 포기하게 했던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제주도 일년 살기나 치앙마이 한달 살기를 떠났다.

 

그들은 쉴 때도 아주 진취적이고 적극적으로 성실하게 쉬었다. 나처럼 기한과 목표도 없이 무작정 좁은 방구석에 틀어박히지 않았다. 쾌적하고 조용한 숙소에서 햇볕을 충분히 받고 자연의 기운을 느끼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겠노라 말했다. 쉬는 동안 무엇을 할지 계획이 확실했고, 소요되는 예산도 면밀하게 검토했다. 주식 투자로 쉬는 동안 생활비를 충당하고, 다음 직장으로 몸값을 올려 이직할 시기도 냉정하게 가늠할 줄 알았다.

 

우리 사회의 엘리트코스와 우울과 헬조선 탈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이들은 점점 많아졌다. 그들의 무수하고 평범한 얼굴을 이 책의 각 페이지에서 확인한다. 자기 손으로 벼농사를 짓지 않았지만, 이 땅의 혹독한 벼농사 체제와 문화를 기업의 조직 문화에 이식한 사람들은 지금 거의 조직에서 사라졌다. 그 이후 등장한 586세대는 그 조직 문화를 충실하게 흡수했고,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자신감으로 더욱 공고하게 했다.

 

문제는 그 다음 세대다. 도무지 벼농사의 협동 정신에 맞지 않아 보이는 이들이 슬금슬금 출현하기 시작했다. 직장 상사와 밥을 먹을 때도 귀에서 에어팟을 빼지 않는 신입사원이나 휴가 때 팀 단톡방을 나가버린다는 직장 후배 이야기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인터넷을 떠돈다. 50대들은 기함하고, 30대들은 입을 쩍 벌리다가 뒤에서 통쾌해하는 그런 이야기. 그럼 40대는? 두 가지 반응 스펙트럼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겠지.

 

물론 이런 직장 괴담들도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최적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가능한 이야기다. 대학 졸업해 취업하고 결혼하여 자식 낳고 사는 삶은 IMF 이후 점점 더 어려워지기만 한다. 대학 졸업해서 학자금대출 갚고 겨우 결혼자금 마련해 30대에 결혼하면 육아에 시달리거나 난임과 부모님 잔소리에 시달린다. 부동산 가격은 연일 폭등하고 상속이나 로또가 아니면 서울에서 아파트 장만은 불가능함을 점점 깨닫는다.

 

그나마 이게 최적노선이다. 일찌감치 대학부터 포기하고 취업 전선에 들어서는 10대들도 많다. 실업계 고등학생이 실습을 나갔다가 산재로 죽은 사건이나 20대 초반 노동자들이 과로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가 죽는 사건들은 잊을 만하면 뉴스를 채운다. ‘내 귀한 자식 살려내라며 통곡하던 부모는 그렇게 귀한 자식이면 대학에 보내지 왜 일하러 보냈느냐는 막말을 듣는다. 최적노선에서 벗어난 이들이 당하는 모욕이다.

 

이 책의 저자 이철승은 우리가 평등과 차별을 동시에 원하는 이들이라고 말한다. 남이 가진 기회라면 나 역시 가지길 원하지만, 결과에서는 남들보다 우월하기를 바란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불평등에 민감하다. 민감함은 불평들을 타파하려는 노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불평등을 싫어하기는커녕 은밀하게 찬양하는 이들이다. ‘공정이 화두가 될 때는 무언가 박탈당하여 나의 유리한 입지가 흔들릴까 두려운 때이다.

 

불평등을 찬양하며 우월감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행복할까? 저자는 이들이 복지국가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국가는 고대부터 벼농사를 돕는 존재였다. 국가는 치수와 재난 관리, 긴급한 구휼을 위해서만 존재했고, 구성원 개인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는 긴급한(선별적) 복지를 담당할 뿐 보편적 복지나 불평등 해소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구성원들도 국가에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보편적 복지에 대한 요구는 곧 세금의 증가로 이어진다. 세수 증가는 사회 안전망의 확충으로도 연결되기에 보편적 복지는 국가의 구성원 모두에게 혜택이다. 벼농사 기질이 확실한 이 땅의 사람들은 이 확실한 혜택을 거부한다. 오히려 입신양명이라는 희박한 가능성에 매달린다. 국가에 보편적 복지를 요구하기보다 국가를 장악하여 자신의 입신양명을 도모하려고 한다. 이들에게 국가는 오래전부터 불평등을 강화하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국가를 신뢰한다. 벼농사 문화가 뿌리 깊은 국가에서 국민이 국가에 보내는 이상한 신뢰는 밀농사나 유목민 문화 국가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은 국가를 신뢰하면서도 언제나 불만이 많다. 국가가 불평등을 강화한다는 점을 이해한 이들은 자신의 특권을 보장하고 강화해주지 않는 국가를 원망한다. 국가가 언제든 다른 편에 선 이들의 특권을 위해 노력할 수 있음 역시 알고 있으므로, 열심히 국가를 감시하기도 한다.

 

이 땅에서 최근 100여 년간 일어난 사건들을 민주주의와 자치에 대한 요구, 시민사회의 강화 같은 표현들 대신 위와 같이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의 저자는 벼농사라는 단어로 이들의 사회와 마음을 이렇게 읽어냈다. 무모하고 자신감 넘치는 연구인 동시에 의외의 논리적 일관성과 매력이 돋보이는 연구이다. 우리가 매일 먹는 쌀과 가끔 겪는 재난, 세금고지서로 존재를 확인하는 국가가 그렇게 연결된다.

 

한편으로 나는 우리가 복지국가를 거부한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몇 마디를 보태고 싶다. 우리는 정말 보편적 복지를 거부하고 자신의 성공이라는 희박한 가능성에만 목매는 이들일까? 어쩌면 우리는 복지 혜택을 받는 일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굶어죽을지언정 국가의 구휼대상이 되지 않겠다는 태도는 삶의 최적노선에서 벗어난 이들을 모욕하던 말이 언제든 자신에게 되돌아올 수 있음을 아는 이들의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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