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루쉰] n개의 루쉰2024-01-10 11:45
작성자

n개의 루쉰

에레혼

 

 

루쉰 선생님의 원고가 라두拉都 거리의 유탸오油条 가게에서 음식을 싸는 데 사용되었다. 나도 그 종이 한 장을 얻게 되었는데 죽은 넋의 번역 원고였다. 나는 선생님께 편지를 써서 이 사실을 알려드렸다. 선생님은 별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쉬 여사님은 매우 화를 내셨다.

루쉰 선생님이 내신 책의 교정쇄는 탁자를 닦는 데 사용되거나 혹은 다른 용도로 쓰였다. 집에서 손님에게 식사 대접을 하시다가 중간 즈음 되면 선생님은 교정쇄를 가지고 오셔서 사람들에게 나눠주신다. 손님들은 원고를 받아보고는 '어떻게 이럴 수가?'라고 하면 선생님은 "좀 닦게나, 닭요리를 들고 먹었으니 손에 기름이 묻었을 거야"라고 하신다.

화장실에 가도 교정쇄가 놓여 있었다._"샤오홍, 루쉰 선생님을 추억하다, 루쉰정선" 중에서

 

 

수호신, 혹은 숭배의 대상. 나에게 루쉰을 정의하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중국에서 상인들은 관우를 재물의 신으로 모신다. 지금도 슈퍼나 식당 등에 들어가면 점포 한구석에 자그마한 관우상이 놓여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나에게 루쉰은 관우상 같은 존재였다. 공부의 신, 글쓰기의 신이라고 하면 더 직관적인 표현일까.

상하이로 유학을 오고 나서, 처음 몇 개월 동안 학기가 시작할 무렵 의식처럼 행하는 루틴이 있었다. 루쉰의 묘소가 있는 루쉰공원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루쉰 동상과 그 옆의 묘지를 지나면 알 수 없는 편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의식이라 이름 붙였다고 특별할 건 없었다. 그저 동상 주변을 배회하면서 "이번 학기도 무사히 지나가게 해주시옵소서" 되뇌면 그만이었다.

그렇다고 루쉰에 대한 존경심이 무한정 샘솟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루쉰의 작품과 글을 떠올리면 지겹고 지독한 기분을 가장 먼저 느꼈다. 지겨움은 중국 문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오랫동안 만난 작가가 루쉰이라는 데에서 나오는 감정이었다. 루쉰은 예고없이 나타났다. 중국 소설은 물론 사상을 공부할 때도, 고전 시가를 배울 때도, 심지어는 영화나 미술에 대한 글을 가볍게 읽는 자리까지도. 매번 루쉰은 경지에 다다른 인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다양한 분야에서 루쉰의 업적을 마주칠 때마다 지독한 사람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중국 각지에서 활동했으며, 체포의 위험 때문에 피신이 일상인 사람이었고, 늘 강연이나 교육에 종사했으면서도 이토록 많은 문헌을 보고 글을 쓸 시간을 어떻게 쥐어 짜냈을까. 루쉰을 보며 느낀 불편한 감정이란, 아마도 나의 불성실함과 대비되는 모습에 대한 무의식적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마스다 와타루의 루쉰의 인상을 읽으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까닭은, 루쉰의 생생한 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학자가 밤샘 공부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괜스레 기시감이 드는 구절이었다.

내가 알고 지낼 무렵 그는 하루의 사분의 일 정도만을 한쪽에 제쳐두고 있다고 했는데, 대개 정오 전에 일어나 동틀 무렵까지 독서하거나 집필하며 서재에 있었다. 언젠가 새벽 2시경에 그가 사는 아파트(2층 이상은 주거공간이었다) 아래 거리를 지나간 적이 있다. 그 아파트의 다른 창은 모두 불이 꺼지고 잠들어 있었지만, 그의 집만은 훤하게 등이 켜져 있었다. 나는 '선생이 아직 공부하고 있구나.'라고 감탄하며 그의 창에서 나오는 불빛을 올려다보았다. 50여세 된 사람이 밤늦도록 공부하고 있는 것은 젊고 게으른 나를 강하게 자극했다._본문 37

이런 면모만을 가지고 루쉰을 책상물림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마스다 와타루 역시 위의 인용된 구절 바로 다음 문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가 언제나 책상에 들러붙어 있는 경직된 모습을 장려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백면서생이라는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근대 중국의 지식인이 아닐까. 논전을 결코 피하려고 하지 않았고, 지식인의 사회 참여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사람이 바로 루쉰 아니던가. 당시 중국 문단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 "문학을 위한 인생"과 같은 사조가 대두되는 상황을 비판하고, 인생을 위한 문학을 제창한 사람도 루쉰이었다.

"'무엇 때문에' 소설을 쓰냐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수십 년간의 '계몽주의'를 보듬으면서 반드시 '인생을 위해서'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추상적인 인생이 아닌 현실의 구체적인 중국 사회와 중국인이라고 하는 안계에 있어서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청년 시대, 신해혁명의 풍조에 의해 양육되고 스스로 혁명 운동에 몸을 던졌던 그는 결국 평생을 혁명가로 살았다. 공허한 인생론이나 이론을 위한 이론은 그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_본문 40

루쉰은 책 속의 활자에 천착하는 만큼이나 현실 정치 문제에도 골몰했다. 새파랗게 젊은 학자들이 글로 그를 비판하면 일일이 답장할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군벌이나 국민당 정부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일삼았기에 자주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쉰은 오명에 휩싸이곤 한다. 루쉰은 여러 정치 풍파에 관여되어 베이징에서 샤먼, 샤먼에서 광저우, 그리고 다시 상하이로 이동하는 도피 생활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며 산다'는 비난을 받은 것이다.

"지금 중국의 소아병적인 청년들은 죽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좋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 쉽게 죽고 싶다는 인간은 진정한 운동을 할 수 없다." 이런 말도 했다. 그것은 당시 이른바 혁명 청년을 비판하는 말이었는데, 그의 생명 존중사람은 생존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한 것이리라._본문 82

단번에 산화되는 삶을 택하는 이도 있지만, 어떤 이는 복수와 도약을 위해 십수 년간 칼을 벼리는 삶을 산다. 후자는 전자에 비해 훨씬 구리고(?) 구차한 삶처럼 보이며 심지어는 오욕을 감내해야 한다. 루쉰은 기꺼이 구질구질한 오욕으로 뛰어든 사람이었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으나 누군가는 그 길을 걸어야만 하기에, 그리고 적임자가 스스로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루쉰은 자신의 생애 절반 이상을 계몽과 혁명에 투신하였다. 루쉰의 소설 작품에서 지식인은 유독 비난의 한복판에 놓여있고, 그는 그 처지를 굳이 해명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모욕당하더라도 후대의 누군가는 바른 길을 걸으리라는 희망. 루쉰 작품 속 지식인 화자가 느끼는 양가 감정은 작가 자신의 삶과 상당 부분 닮아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인지, 루쉰에 대한 글 상당수는 그를 신격화한다. 특히 중국에서 루쉰에 대해 평가한 글 상당수는 그를 혁명의 기수로 추앙하는 데에 급급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스다 와타루의 시선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는 루쉰에 대해서 지근거리에서 관찰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루쉰에 대한 다양한 면모를 가감없이 담아내고 있다. 루쉰의 인상은 루쉰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루쉰의 작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는 해설서가 아니라, 개별 독자의 루쉰에 대한 인상을 구축할 것을 촉구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루쉰의 책은 신주단지일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붕어빵 포장지에 지나지 않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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