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루쉰] 대가에게는 욕도 문학이다2024-01-25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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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인상<루쉰과 일본>, <루쉰의 죽음 - 세 통의 편지>, <루쉰 잡기>

 

일본인인 이 책의 저자 마스다 와타루는 일본에서 루쉰의 유학 생활이 어떠했는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루쉰이 어떻게 여기는지에 관심이 많았던 듯하다. 저자의 서술대로 루쉰의 삶에는 중요한 일본인이 여럿 등장했다. 어떤 인연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이어졌다. 루쉰의 죽음 당시 일본에 있었던 저자는 루쉰의 장례를 함께하지 못한 대신 기록을 충실하게 남기며 루쉰의 글과 삶을 더 많이 알리려 노력한다.

 

루쉰은 스물한 살에 일본으로 떠나 이십대를 거의 일본에서 보냈다. 그동안 일본어와 독일어를 공부했고,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다 중퇴했다. 문학잡지를 창간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동생과 함께 외국소설을 번역하여 출판했으나 판매가 몹시 저조했다. 외국의 의학을 배워 중국인의 몸을 돌보겠다던 루쉰은 그 유명한 환등기 사건 이후 몸은 건장하나 정신이 흐리멍덩한 중국인의 상황을 깨달았고, 정신 개조가 더 시급함을 깨달았다.

 

다윈의 진화론을 오해한 사회진화론을 신봉했던 루쉰은 문명과 발전과 계몽을 자주 주장했다. 문명과 발전과 계몽에서 희망을 찾았으나, 자주 절망했다. 희망으로만 살 수도 없고 절망으로만 살 수도 없다. 루쉰은 자전적 소설 <고향>의 말미에서 희망도, 절망도 없다고 쓴다. 길은 처음부터 있지 않았기에 누군가는 루쉰의 말대로 어둠 속에서 코가 뭉툭해지도록 부딪히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길이 생겨난다.

 

이 책을 읽으며 루쉰이 내 예상보다 훨씬 모순적인 사람이라고 느꼈다. 루쉰의 글만 읽어서는 알 수 없는 면모들이었다. 중국문학의 대가로서 일본인들과 교류하는 모습도 의외였고, 이십대를 보낸 일본에 향수를 느끼는 점도 그랬다. 어찌 보면 일본에서 보낸 이십대는 루쉰이라는 인물의 기반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니체를 번역하고 케테 콜비츠와 교류하고 문학에서 계몽의 가능성을 발견한 일도 모두 일본 유학생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루쉰은 생의 마지막 십 년 동안 일본인 우치야마 간조에게 삶의 여러 가지를 의탁했다. 우치야마가 소개한 일본인 의사에게도 의지했으며, 그들은 루쉰은 성심껏 돌보았다. 상하이에 있던 일본 문인이나 출판인들도 루쉰과 교류했다. 루쉰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미워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던 듯하다. 반면에 동생의 아내이며 일본인인 하부토 노부코와는 사이가 몹시 나빴는데, 노부코가 일본인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겠다.

 

죽음이 삶의 일부라면 어떤 이들의 삶은 죽음을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루쉰의 죽음과 장례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그랬다. 신속하게 장례위원회가 진행되고 중국을 넘어 외국에서도 추모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장례식을 찾은 6천 명이 대부분 청년과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어떤 말이나 글보다 루쉰의 삶을 잘 보여준다. 그 장례식이 어떤 종교적 의례도 없이 지인들의 추모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역시 그렇다.

 

이 책의 저자인 마스다 와타루가 받은 편지에는 루쉰의 장례식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읽으며 루쉰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계몽을 믿었던 루쉰은 한편으로 증오와 복수심을 감추지 않던 인물이었다. 인자하고 선량한 지식인의 모습을 강조하던 시절에 루쉰은 정인군자를 증오한다며 스스로 건달을 자처했다. 청년들에게 발전을 강조하던 그는 무엇보다 생존이 먼저라는 충고를 가장 앞에 놓는 이였다.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다는 말보다 더 단단한 위로를 들은 적이 없다. 그 말은 희망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사람들은 길이 없는 곳을 가는 코가 뭉툭해진 이를 알아본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쓰고 거친 진심을 내뱉는 단단한 이를 알아본다. 의심이 많고 화를 참지 못했던 그가 내뱉는 말이 증오에서 우러나온 욕이라 해도 사람들은 그 안에서 애정과 함께 문학의 어떤 일면을 보았다. 대가에게는 욕도 문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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