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윤리학]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3, 4장. 장애를 선택하는 것을 상상하라!2024-07-13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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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페미니즘적 미래에 대한 논쟁 : 미끄러운 경사로, 문화적 불안, 농인 레즈비언의 사례 

 

1.마지 피어시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 평등한 사회를 그린 소설로 페미니즘 문학의 고전으로 꼽힌다. 여성학 학생들도 소설 속 유토피아가 희망적이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장애학자로서 ‘어떤 삭제, 즉 장애 및 장애 있는 몸에 대한 삭제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 소설 속 유토피아 마을인 메타포이셋은 완전히 ‘페미니즘적이고 반인종차별적이며 사회적으로 정의롭고 다문화적’인 공동체로 그려진다. 이곳은 전 인구 구성원의 유전자를 혼합하는 인공발육장이라는 재생산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혼합파와 조작파의 민주적인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혼합파는 결함과 질병에 관련된 유전자를 가려내서 ‘부정적인’ 특성을 제거하고자 하고, 조작파는 ‘긍정적인’ 특성과 관련한 유전자를 선별해내어 전달하고자 한다. 

 

-부정적인 것을 걸러내는 것이든 긍정적인 것만 남기는 것이든 ‘선별’한다는 단어에서 우생학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런데 저자가 이 부분을 강조해서 드러내지 않았다면 나는 소설을 읽을 때 과연 문제의식을 가졌을까. 유토피아라 하면 나 역시 질병, 장애가 모조리 치유되고 모두가 아프지 않은 세상을 막연히 떠올렸을 것 같다. 저자의 지적을 따라가보니 어디부터 손상 또는 장애라 할 것인지, 정상상태를 뭐라 규정할것인지, 모든 비정상성이라 여겨지는 것을 회복시키다가 오히려 다양성이 침해되고 인류생존에 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건 아닌지 생각이 이어진다. 

 

 - 저자는 상상 속 유토피아에서 마저 장애인이 설 자리가 존재하지 않음을 포착해낸다. 소설은 ‘부정적’ 형질이 무엇인지 이미 모두가 동의하고 있고 따라서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고 전제하고 있다. 손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은 의문이나 분석의 여지 없이 자연스러운 목표인 것이다. 저자는 심지어 현대 페미니스트들 마저 이를 아무도 비판하지 않고 있음을 애석해 하는 듯하다. 

모두가 그리는 유토피아에 내 자리가 없다면, 아예 태어나서는 안되는 존재로 그려진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유토피아일지, 그것이 과연 유토피아일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2.농인 레즈비언 커플 사례

- 농인 레즈비언 커플이 본인들과 더 깊은 소통이 가능할 농인 아이를 원했기에 농인 정자를 기증받아 농인 자녀를 낳았다.

 

- 같은 사례를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작가 김원영 역시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주목하는 지점이 김원영과 앨리슨 케이퍼가 달랐는데 김원영은 장애 또는 농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에 대한 논쟁만을 다뤘고 케이퍼는 이들이 레즈비언이었기에 동성애와 장애를 관련지은 비난이 거셌다는 것을 비중있게 다룬다. (내 생각엔 이성애 농인 커플이더라도 농인 정자를 일부러 택해서 낳는다면 그 역시 논쟁이 벌어질 것 같긴 하지만, 동성애 커플인 경우에 비난이 더욱 가중되리라는 점은 불행히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 농을 단순히 장애로 볼 것인지, 아니면 외국어와 같은 농 문화로 볼 것인지는 동성애 논쟁에 대한 언급 없이 장애(농) 부분에만 집중한 김원영의 글에서 보다 선명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케이퍼가 소개하는 다각도의 논란 및 다양한 비난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 사례를 장애 또는 농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문제를 넘어서 보다 다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생각해 볼 지점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 다양한 관점의 논란들

.장애(농)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아이들에게 고난을 물려준데 대한 비난 (그렇다면 빈곤한 가정은 아이들에게 부유한 환경을 지원해주지 못해 고난을 겪게 하므로 출산을 금해야 할까)

.부모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장애아동을 의도적으로 제조하는 이러한 관행은 디스토피아로 가는 미끄러운 경사로가 될 수 있다는 주장.

.이성애 관계의 재생산은 자연스러우나 퀴어 커플은 그렇지 않다는 인식

.어떤 장애는 다른 장애보다 더 나쁘다는 편견을 갖고 ‘만일 시각장애를 갖게 된다면 그것은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모든 장애에 대한 욕구로까지 확대되는것은 아니잖은가’ 라며 도발.

.불임 이성애 농인 커플이 농인 정자를 선택했다면 그나마 좀 나을텐데 농과 동성애를 결합하는건 너무 비정상적이고 너무 퀴어스럽다는 지적

.동성커플이나 싱글 부모가 인공수정을 활용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 보조생식기술은 그런데 쓰라고 있는것이 아니다.(케이퍼는 이를 ‘기술 단속 강화’로 일컬음)

 

- 농을 문화적 관점으로 보면 인종, 국가와 같은 문화적 선택지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럼 농을 장애로 본다면 장애는 선택해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왜 그런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 체임버스 사건 : 불임클리닉에서 인공수정을 원하는 여성에게 치료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녀는 흑인이자 레즈비언이고 맹인이며 싱글이다. 병원에서는 시각장애로 인해 양육이 가능한지 증명을 요구했다. 인종과 성적지향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지만 재판과정 및 언론 보도에서는 맹에 관해서만 언급이 된다. 그들은 인종과 성적지향을 건드리는 것은 정치적이고 명백한 차별로 인식이 되기에 언급하지 않았으나(할 수 없으나), 장애(맹)에 대해 논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고, 정치적이지 않으며, 상식적이고 아동보호에 대한 문제인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이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생각된다. ‘장애를 제거하는 목표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공적 논의를 요구하거나 할 가치가 없다.’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있다.(215)

 

- 케이퍼는 농인 레즈비언 사례가 농과 장애를 치유하고 퀴어 부모가 아이를 갖는 것의 위험성을 말하는 주류 담론의 대항서사로 읽혀야 한다고 제안한다. ‘재생산 기술이 결함을 걸러내는 수단 이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 장애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는 것, 모든 사람이 장애 없는 미래를 갈망하지는 않는다는 것, 퀴어한 움직임과 지향을 가진 몸들을 위한 자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장애와 퀴어성은 지금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정말 바람직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장애를 선택하는 것을 상상하라!”(220)

 

 

4장 누구를 위한 미래인가? : <전하라> 광고판 해방하기

 

- <전하라> 광고판 : ‘장애나 어려운 처지를 극복한 이런 모범 사례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라는 메시지가 담긴 FBL(Foundation for the Better Life) 캠페인. 극복, 결의, 용기, 노력, 강인함 등 각종 긍정적이라고 생각되는 가치들을 부각시킨다. 저자는 이 광고판들의 예시를 하나하나 들어가면서 이들이 어떤 고려할 점들을 가려버리는지 밝히고 있다. 

 

- 이 캠페인은 더 나은 삶과 긍정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 모두가 동의하고 있음을 당연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장애 있는 몸에 전략적으로 의지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저자는 지적한다. 장애 뿐만 아니라 캠페인에 등장하는 모든 가치를 탈정치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가 아닌 상식으로 만들기 위해 장애있는 몸이 활용되고 있다.

“중증 장애인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여러분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불평하지 말고 기운 내서 열심히 노력하고 극복하세요.”(240) 

내 처지가 저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게끔 하여, 내가 이런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을 ‘노오력’을 하지 않는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이는 모든 상황을 탈맥락화하여 사회적, 정치적, 집단적 책임에 대한 비판을 가로막는 효과가 있다. 

 

- 이 캠페인에는 젠더화된 가정이 숨어있다. 어머니의 헌신은 진부하여 드러내지 않으나 아버지의 헌신은 이례적이므로 추켜세우고 찬사를 보낸다.

 

- 비장애중심주의적 태도를 흐리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 저들은 모두 강인한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비장애인으로서는 평범해보이는 일도 장애인이 해내면 과한 찬사를 보내는 것은 모두 비장애 중심적인 태도이다. 

 

- 개인의 책임에 초점을 맞추면 장애를 극복하는 게 삶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 되고, 삶의 다른 측면은 모두 삭제되어 버린다. 이들의 삶의 다른 측면을 담아내기 위해 더 나은 삶에 대한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장애를 인종, 젠더, 계급처럼 인간 삶의 구조 중 일부로 맥락화하는 작업을 제안한다. 

 

- 이 광고판은 더 나은 미국의 모습을 그리고,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인성을 부각함으로써 애국심과 민족주의, 신자유주의 사상을 전파, 강화시키고 있다.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온데 반해 장애 광고판에 관해서는 거의 논의된 적이 없다. 이렇듯 장애를 다룬 광고판은 정치와 무관한 것으로 여겨져 논쟁이 아예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바로 문제이다.

 

- 저자는 장애인의 ‘착실하고 동화주의적인 이미지에 말썽’을 일으키는 광고판을 상상하며 기존의 인식을 해방, 전복시키고자 한다. 불구화되고 퀴어화된 광고판을 통해 무엇이 누구에게 더 살 만한 삶이 될 수 있는지를 사유하게 만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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