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정치철학] 주권, 국민, 대의제를 넘어 민주주의를 상상하라2025-02-17 08:57
작성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2. 민주주의는 국민주권을 의미하는가

 

흔히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국민주권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에 대의제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으로 대의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대의제의 불가피성과 직접민주주의의 비현실성에 많은 이들이 동의할수록 대의(대표) 개념에 관한 성찰의 여지는 줄어든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든다. 과연 대의(대표) 개념은 인민주권 실현을 위해 고안된 제도인가.

 

저자는 대의 개념이 단순히 인민주권 실현을 위해 고안된 제도가 아니라고 단언한다.(46) 나아가 대의 개념이 불가능했다면 인민주권 개념도 불가능했으리라고 주장한다. 대의될 수 없다면 인민(국민) 관념도 생겨날 수 없다. 결국 대의 개념은 민주주의에 대한 근대적 이해의 핵심에 있다. 그렇다면 근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대의 개념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인민이나 주권 개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47)

 

우리가 대의제 아닌 민주주의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의제는 인민, 주권 개념과 떨어질 수 없기에 우리는 대의제가 아닌 방식으로 인민주권을 실현하는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 없다. 이제 인민과 주권, 대표 없이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이 개념들은 모두 근대에 형성된 신비하고 불확실한 개념이다. 저자는 이 개념들의 불확실성을 파헤치며, 민주주의를 새롭게 이해하려고 한다.(47)

 

근대 사상가들은 민주주의를 인민이 주권을 가지는주권의 한 양식이라고 보았다. 보댕이나 홉스 같은 사상가들은 국가와 거번먼트를 구분했지만, ‘예외상태나 강제성을 주권의 특징으로 이해했다. 인민주권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내부의 통일성이 필요하고, 군주의 주권은 법 밖에서 이 통일성을 강제했다. 공동체 내부의 통일성이 확보되면 비로소 인민주권이 가능해지고, ‘법 앞에 평등한 만인이라는 개념도 나타난다.(57)

 

인민은 인민주권 이전에 가능했던 개념이 아니다. 인민주권은 인민을 전제하지만, 동시에 인민을 구성한다. 인민 권력을 강화하는 민주화는 인민을 구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민은 국가를 구성하는 집합적 신체와 같다. 홉스가 이를 구성하는 힘을 군주에게서 발견한다면, 루소는 여기서 국가인민을 발견한다. 주권의 탄생은 인민과 근대 국가의 탄생이며, 사실상 주권이론은 어떤 정치형태에서든 인민주권을 발견한다.

 

그러니 놀랍게도 인민주권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군주정과 귀족정 역시 주권과 인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60) 홉스의 말대로 인민이 (비대칭적) 사회계약의 주체가 되려면 동물성을 박탈당하고 인간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전통적 공동체에서 벗어나 개별화(개인화)되어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유롭고 평등하고 무력한 개인들이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군주도 갖지 못한 절대적 권력을 만들어낸다.

 

전능한 (인민)주권과 무력한 인민이라는 아이러니를 가능하게 해 주는 존재가 바로 대표(대의)이다. 대의제는 인민주권과 함께 성장했다.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인민은 무력해지고 인민이 무력해질수록 절대권력을 부여받은 정부의 힘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70) 정부가 개인들이 겪는 모든 불행의 구원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민과 사회를 보호하는 국가는 배제와 차별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저자는 이처럼 주권과 인민에 기반하는 근대 정치가 또한 대의제에 기반한다고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근대 정치는 모두 대의제이다. 대의제가 민주주의를 실현한다기보다 근대 민주주의가 대의제의 하나로 등장했다고 보아야 한다.(71) 1770년대 미국 연방주의자들이 말하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오히려 인민주권으로부터 정치체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와 구분되는 공화주의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72)

 

대의제는 이처럼 인민주권을 전제하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보편적인 선거제도와 구성원의 동질성은 구성원 안에 대의 불가능한 존재가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 가능성의 부인 자체에서 대의 불가능성이 생겨난다는 저자의 견해는, 민주주의를 다수결이 아닌 소수성과 연결한 이 책의 1장에서 내렸던 결론과 닿아있다. 또 굳이 국가와 주권을 이야기하면서 국민이 아닌 인민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이유도 드러난다.

 

저자는 이 책 2장의 결론에서 주권-인민-대표를 민주주의의 전제가 아닌 문제로 설정한다. 주권()의 통치력을 넘어 윤리를 구축하는 코뮨의 구성, 인민(국민)의 통일성을 깨뜨리고 해체하는 비국민인터내셔널’, 대의를 거부하거나 대의 불가능한 존재들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상할 힘을 얻는다. 허구적 동질성이 아닌 현실의 추방당하고 식별 불가능한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일이 바로 민주임을 깨달으면서.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