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과학읽기] 물리학의 종교적 기원에 대하여2025-03-1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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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이 잃어버린 여성>서론/1장 만물은 수/2장 수학자로서의 신


물리학의 종교적 기원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적 우주, 즉 신이 세상을 창조했으며 죽으면 영혼이 천상에 거주하게 된다는 세계관은 17세기 새로운 물리학자들에 의해 무너졌다. 물리학자들은 그 대신에 뉴턴적 우주를 구축했고 오늘날 우리는 사실상 그 안에서 살고 있다. 영적 우주론에서 물리적 우주론으로의 변화는 단순히 논리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과학도 다른 모든 인간 활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문화적 힘들이 형성한 것이다. 물리학의 발전은 불가피하지도 불가항력적이지도 않고, 문화적으로 우발적 요인들과 인간적 선택에 달려 있다. 무엇 때문에 17세기 서구 문화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상을 수립하게 되었는가? 저자는 물리학 그 자체의 종교적 기원 및 연관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현대물리학의 종교적 연원을 이해하려면 17세기보다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갈릴레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시작해야 한다. 종교와 수리과학의 연관은 서구 문화의 발상기인 기원전 6세기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오니아의 철학자였던 피타고라스는 수학을 실재에 대한 열쇠로 보는 세계관을 개척했다. 피타고라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수학이란 물리적 세계의 열쇠일 뿐 아니라 영적 세계의 열쇠였으며, 그들은 수數를 문자 그대로 신이라고 믿었다. 수와 수적 관계를 명상함으로써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신적인 것”과의 합일을 추구했다. 그들에게 수학이란 무엇보다도 종교적 행위였다. 피타고라스 정신은 약 천 년 동안 신비적 교파로 명맥을 이어오다 중세 후기 유럽인들이 그리스인의 학문을 다시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교 문화의 한복판에서 정량 과학을 위한 터전이 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이란 신적인 지식이므로 오로지 심신이 제대로 정화된 자들에게만 알려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마테마티코이(학습자)는 사제 정신으로 공부에 임했다.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수의 비물량적인 속성이 윤리적 원형 노릇을 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들은 수학을 연구하면 인간 행동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홀수를 남성으로 짝수를 여성으로 간주하였으므로, 홀수와 짝수의 특수한 속성을 성별에 따른 도덕적 특징들로 여겼다. 특히, 홀수는 선하고 짝수는 악하다는 피타고라스적 발상 탓에 그들은 여성을 결정적으로 악의 편으로 몰아세웠다. 피타고라스적 이원론이다. 한편에는 선의 자질과 홀수성과 남성성이, 다른 한편에는 악의 자질과 짝수성과 여성성이 확연히 구분되었다. 피타고라스적 수학자의 의무는 개별 수의 특성과 그들 사의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수학자는 어쩔 수 없이 윤리학의 생도가 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신성을 자연 가운데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초시간적 정태성 및 부동성과 동일시했다. 실로 수의 신들이라는 개념의 요체는 수가 어쩔 수 없이 변화하고 소멸하게 되어 있는 자연을 초월해 있다는 것이었다. 자연을 초월한다는 데에는 “여성적인 것을” 초월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리스 사상 전반이 그렇듯이, 피타고라스주의에서도 자연을 이루는 실체인 물질이란 본래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적 이원론의 핵심은 남성성은 비물적인인 천상계, 여성성은 물질적인 지상계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모든 수를 그 자체가 영혼의 영역(남성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수학도 근본적으로 남성적인 활동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피타고라스의 수학은 자연 가운데서 자연을 넘어서는 것을  찾아내는 초월적 활동이었으므로, 중세에 그리스도교의 맥락 가운데서 피타고라스적 정신이 다시 나타났을 때, 수학과 그리스도교의 신은 쉽게 관련지어졌다.


유럽이 그리스 수학 및 과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던 중세 인문주의 운동은 여성을 배제하는 데에도 한몫했다. 중세 후기에 일어난 고대 학문의 부흥은 성직자로 수련받은 남성에게만 고등교육을 허락하는 성직개혁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중세 대학들은 성직자들을 양성하고자 세운 것이었다. 여성은 성직으로 나갈 수 없는 만큼 대학에도 갈 수 없었고, 달리수학을 배울 장소가 없었으므로, 수리과학의 그리스도교적 부흥에서도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여성을 교육의 주류에서 소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라틴어 채택이었다. 성직개혁을 추진했던 카롤루스대제는 라틴어를 교회 학문의 공식 언어로 삼도록 명령했고, 소년은 성당학교에서 여러 해 동안 라틴어 문법과 어휘를 배웠다. 라틴어는 살아있는 언어가 아니었으므로, 라틴어를 익히려면 공식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여성은 공식 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카롤루스대제에 이어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여성의 교육받을 기회를 차단하는 더 강력한 원인을 제공한다. 바로 모든 성직자에게 정절을 강요하는 조치인 독신주의다. 결혼한 성직자들은 환속을 강요받거나 투옥되었다. 결혼한 사제 가운데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독신주의가 규범화될 수밖에 없었고 여성의 존재 자체가 터부시되기에 이른다.


그레고리우스 개혁을 추진하는 이들이 독신주의를 의무화하기로 한 데에는 여성혐오 그 자체보다는 교회 재산을 축적하고 합병하려는 야심이 더 크게 작용했다. 성직자에게 가족이 없으면 땅이나 다른 재산을 요구할 자녀도 없게 되며, 따라서 재산은 모두 교회로 돌아간다. 이런 정책의 한 가지 불운한 부산물이 성직 사회 내의 여성혐오였으며, 이는 곧 학계 전반으로 퍼져갔다. 


13세기 들어 최초의 대학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고등교육기관들은 성당학교 제도에서 발전했고, 성당학교들처럼 남성 성직자를 모집하고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므로 여성은 이들 대학에 다닐 수 없었다. 그러나 여성이 대학에 갈 수 없었던 것은 성당학교에 갈 수 없었던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당시 대학은 고대 그리스인의 유산이 부흥하는 중심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대학에 다닐 수 없었다는 것은 중세 전성기에 일어난 철학과 수학의 부흥에서 사실상 소외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대학들이 성직자 양성기관이었던 만큼, 학자들도 독신으로 살 것이 기대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의 매춘 증가는 대학 발전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유럽에서 매춘이 일반적으로 용인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였으며, 당시 많은 사창가가 대학 가까이에 형성되었고, 주 고객은 학생이었다.” 상아탑의 연구자들은 여성이 다니는 길에는 ‘사악함’이 있다고 여겼다. 결국 창녀를 찾아갈 수는 있었지만, 일반 여성은 멀리 해야 하는 것이었다. 대학의 독신주의는 길고 파란만장한 역사로 이어졌다. 1882년에서야 비로소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중세 교수는 가족을 꾸릴 수 없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자녀도 없었다.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 고증에 따르면, 과학 대부분이 처음 생겨나던 시절에는 여성이 참여했고, 실상 많은 과학은 여성이 적극적 역할을 하던 가내수공업 전통에 기초해 있었다고 한다. 물리학만 예외였던 것은 물리학이 어떤 수공업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세 물리학은 순전히 대학이라는 신권주의적 환경에서 발흥했고, 훗날 물리학이 대학 사회 바깥으로 발전해갔을 때도 물리학자는 여전히 대학에서 훈련받아야 했다. 수학 교육이 대학과 결부되어 있었으므로, 여성의 대학 입학이라는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여성은 물리학 분야에서 전적으로 배제되었다. 


새롭게 설립된 대학들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서구로 돌아오던 고대 문서의 연구였다. 단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주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론뿐 아니라 생물학과 물리학도 다뤘다. 이 위대한 논리학자가 중세인에게 호소력을 지녔던 중요한 이유는 그의 사상이 여러 면에서 (그의 과학이 지닌 목적론적 성격은 물론이고) 그리스도교와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리스도교 교의에 통합했고, 신학과 자연과학은 위대한 종합을 이루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이 지배하는 것과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세계를 수학의 언어로 묘사하는 피타고라스적 과학 경향이다. 피타고라스적 신조를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신을 수학적 창조주로 개조했다. 신학자 로버트 그로스테스트와 로저 베이컨을 통해 이 경향들이 확실해졌다. 로저 베이컨의 경우, 과학을 “신학의 시녀”라고 칭한 것으로 유명하며, 적그리스도의 위치를 알아내는 데까지 수학을 활용하고 개종에도 과학을 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베이컨은 사람들이 기하학을 통해 그림 속 사건을 진정으로 믿게 할 만큼 사실적 그림을 그릴 것을 교육했다. 그러면 기적도 실제 일어나는 듯한 실감을 주게 되어 사람들은 성서의 진리를 자기 눈으로 보게 되리라고 했다. 신은 유클리드 기하학 원리에 따라 세계를 창조했으므로,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적은 그림의 미덕을 찬양하며 교회가 종교 예술에서도 삼차원 공간을 모방하도록 권장했다. 회화는 이미 12세기 중반부터 중세 초기 미술의 평면 양식과 멀어지고 있었지만 베이컨은 이른바 기하학적 원근법을 의식적으로 지지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다. 이런 변화는 물리학사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새로운 재현 방식과 더불어 유럽인은 공간 자체를 기하학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은 모든 인물을 단일한 유클리드 공간 안에서 대등하게 그리기 시작했고(그 전에는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크게, 천사는 인간보다 크게 그리는 등 위계질서를 둠), 그리스도와 천사는 인간과 같은 크기가 되었다. 


회화의 기하화는 단순히 예술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인이 주위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에 지대한 변화를 일어났다는 징표였다. 서구 정신은 영적 관계에 시선을 집중하기보다 점차 물리적 환경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보는 방식에서의 혁명 없이는 갈릴레이와 17세기 수리물리학자들이 일으킨 과학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기하학적 그림’의 유산은 로저 베이컨의 상상보다 컸다. 한편, 수리물리학의 개척자들은 죄, 애덕, 은총 같은 개념에도 수학적 분석을 적용하려 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이들 계산자들은 속도와 가속도처럼 이런 개념도 물량적으로 취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은총까지도 수학으로 만들려는 야심은 육체와 정신을 모두 포괄하는 세계상에 대한 열망을 말해준다. 


세계에 대한 앎의 길은 계량을 통해서라고 선언한 니콜라우스 폰 쿠스의 예처럼, 피타고라스적 그리스도교는 최고조에 이른다. 쿠스의 말년은 르네상스의 전성기였다. 다빈치와 보티첼리가 젊었을 때였으며, 회화, 건축, 조각, 기술 등이 인문주의 양지에서 번성하고 있었다. 다빈치는 늘 학생들에게 수학을 공부하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예술가도 철학자도 주위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우주 그 자체를 개조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영적 우주론에서 물리적 우주론으로의 변화가 싹을 트고 있었지만, 이는 혁명이라기보다는 계승에 가까운 양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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