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사회/비평] '빈곤의 인류학'에서 '연루됨'으로2025-04-0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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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루됨3부 관찰하기, 4부 연루되기

 

이 세계의 다수는 사실상 연루자이고 공모자다.”

- 연루됨92, 조문영

 

흔히들 인류학(人類學, anthropology)을 인간에 관한 학문이라고 말한다. 인류학자는 소규모의 집단을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 관찰하면서 연구한다. 복잡한 사회보다는 단순한 사회가 그런 관찰에 더 적합하다. 문명화된 사회의 개인들이 인류학자의 집요한 관찰을 쉽게 용납할 리도 없다. 인류학자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도시보다는 촌락으로, 대규모 사회보다는 작은 부족 집단으로, 변화와 이동이 활발하지 않은 곳으로 쏠린다.

 

인간을 탐구한다는 뜻의 명칭과는 별개로, 인류학은 오랫동안 인간 안의 타자들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다. 사회 안에서 더 적은 재화와 권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 문명화된 사회가 누리는 발전의 혜택에서 멀어진 이들,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거나 폭력의 희생자가 된 이들이 그 대상이었다. 인류학자들은 그들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관찰하고, 기록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보이는 호기심은 종종 타자성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과거의 인류학자들이 주로 다른 인종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현재의 인류학자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타자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도 인류학자로서 인간을 연구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인류학을 가르친다. 그가 개설한 수업의 제목은 <빈곤의 인류학>이다. 과거의 인류학자들이 다른 인종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동시에 자신과 분리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빈곤을 연구하는 저자의 태도는 과연 어떨까.

 

저자는 우리 사회의 빈곤과는 동떨어진 채 살아온 학생들에게 빈곤을 가르치는 일을 뿌듯하게 여긴다. 학생들과 쪽방촌을 누비면서 학생들이 빈곤한 이들을 대상화할까 봐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빈곤을 연구 대상으로 삼겠다는 <빈곤의 인류학>이라는 수업 자체에 대상화하는 관점과 태도가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 전에 인류학 자체가 이미 인간을, 인간 내부의 타자를 대상화하는 학문이 아닌가.

 

인류학자는 사회를 응시하고 관찰하고 기록하기에, 빈곤 자체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빈곤을 대하는 태도까지도 관찰하고 기록하며 해석한다. 사회의 구성원들은 빈곤을 대상화하는 동시에 두려워한다. 빈곤은 누구에게도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또 인류학자는 집요한 응시를 통해 대상화를 넘어서는 자신만의 관점을 구축하기도 한다. 빈곤한 이들을 관찰하며, 그들이 단지 시혜만을 요구하는 이들이 아님을 이해하는 이도 인류학자다.

 

나는 인류학자의 객관적인시선을 믿지 않는다. 인류 중 누구도 객관적일 수 없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그들의 연구가 믿음직한 합리적결론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나는 이 책의 저자가 연루됨이라는 제목을 내세운 이유에 기대를 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태도로 위장하던 저자가 갑자기 를 주어로 사용하여 쓴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 너머에 담긴 당황과 불안을 엿본다. 어떤 수사보다도 강한 침투력을 가진 당황과 불안.

 

이 책 연루됨의 저자는 자신이 인류학자임을 당당하게 말한다. 나아가 인류학자라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인류학자가 안이한 묵시록에 머무르지 않고 살아갈 가능성을 곧잘 발견하게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어쩌면 나는 그 가능성이 탁월한 학자의 결론이 아니라 지치지 않는 응시의 힘에서 비롯된 낙관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끈기와 용기를 이미 가졌다면, 세상에 무엇이 두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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