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과학읽기] 우리는 어쩌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도달했을까? 2025-05-27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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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읽기]<자연에 이름 붙이기> 5월 27일(화) - 발제 : 아라차


우리는 어쩌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도달했을까? 


과학자 부모를 둔 소녀는 집 뒤편에 있는 숲속을 맘껏 헤매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뱀, 까마귀, 난초, 단풍나무, 두꺼비들이 사는 숲속을 누비며, 자기가 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생명의 세계를 익혔다. 생명의 세계는 아무렇게나 뒤죽박죽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비슷한 것들끼리 무리를 이루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있는 그대로 명백하고 당연하고 구체적인 앎이었다. 소녀는 자라 생물학자가 되었다. 진짜 과학자가 되어 생명의 세계가 어떤 질서로 이뤄져 있는지 연구하면서 본격적인 자연 탐험가가 되고 싶었다. 


생명의 세계를 질서에 맞춰 분류하는 방법은, 그 일을 하는 과학자들의 생각은 생각보다 심하게 엇갈렸다. 분류학 분야는 생물학자들 사이에도 해결하기 어려운 논쟁들로 악명이 높았다. 분류학이 형성된 18세기에도, 그러니까 새로운 대륙에서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던 식물과 동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두고 열띤 논쟁을 벌였고 여전히 그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소녀는 과학적 분류가 명백한 진실로 보이는 것과 충돌하더라도 과학의 우위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나머지 온 세계가 모르는 은밀한 정보를 과학자들은 알고 있으니 분명히 과학이 옳을 거라고 확신했다. 


1980년대(?)에 한 분류학자 무리들이 생명 분류에 대해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새로운 방법으로, 즉 생명 진화의 계통수에 따라 각자 어느 가지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방법으로 현대 분류학을 눈부시게 수행했다. 바로 분기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따르고 있었는데, 이 방식으로 생명의 세계를 분류하면 ‘어류’라는 분류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류가 없다고? 그것은 과학이라면 덮어놓고 믿었던 소녀의 마음마저 한계에 부딪히게 했다. 


최첨단 과학과 진짜 현실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 일어난 심각한 충돌. 희생된 것은 물고만이 아니었다. 얼룩말도, 나방들도 사라졌다. 다른 무엇보다 과학을 신뢰해야 한다는 걸 알 정도로 분별있는 어른으로 성장한 소녀는 물고기와 얼룩말과 나방의 죽음이 옳고도 타당한 일이라고 여겨야 했다. 그러나 다른 문화권들의 방식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마주한다. 소녀는 사실, 민속 분류학을 연구하며 다양한 문화권에서 얼마나 엉뚱한 방식으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는지 명확히 정리해 주면서 현대 과학의 정확함을 드러내고 싶었다. 


연구는 실제로 이국적인 것들과 이상한 동물과 더 이상한 식물로 가득했고 매혹적일 정도로 생소한 개념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모두가 무질서와 혼돈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정반대였다. 모든 집단이 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했을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사람들은 어디에 살고 있든, 어떤 언어로 말하든, 심지어 어떤 동물과 식물을 분류하든 상관없이 자기네 주변의 생물들을 서로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심지어 판에 박힌 방식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무수히 다양한 민속분류학들은 밑바탕을 보면 모두 한 주제에 대한 변주들이었다. 


알고 보니 그건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 알아보는 자연의 질서였다. 세상 사람들이 생명을 분류하는 방식이 어찌나 정형화되고 한결같았는지, 사람들이 생명을 분류할 때 무의식적으로 따른다고 여겨지는 실제적 규칙들까지 구체적으로 열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책의 저자가 된 소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민속 분류학 사이에 일관성이 존재한다고? 생명 분류의 규칙이 있다고? 저자는 늘 전문적 과학이라고 생각해왔던 분류학이 무언가 다른 것, 훨씬 더 깊이 자리한 무엇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매우 특수한 부류의 뇌 손상 환자들을 알게 된다. 뇌부종에서 회복한 환자가 무생물 대상들을 알아볼 수 있지만 살아 있는 것들은 하나도 알아보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주전자, 나침반 등은 알지만 캥거루와 버섯은 무엇인지 말하지 못했다. 뇌사에서 깨어난 환자가 생물을 식별할 때 큰 혼란을 겪는 사례도 있었다. 이들은 자연의 질서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뇌의 특정한 부분에 손상이 생긴 것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생명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에 특화된 뇌 영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과학자들은 분류학이 하는 일이 어떤 면에서는 선천적인 행위일지 모른다고 주장한 셈이다. 


저자는 분류학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깔끔하고 견고한 과학의 모습이 아니라 무언가 본능적인 것, 마치 희망처럼 새로 태어나는 모든 아이에게서 영원히 새로 샘솟는 무엇 같아 보였다. 생명의 세계를 분류하는 일, 자연의 질서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감지하는 일은 추상적인 실험실 과학보다는 훨씬 더 큰 무엇일지 모른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존재함, 살아있음에 따르는 필수적인 기능이면서, 최소한 삶의 초기에는 억누를 수 없는 기능 중 하나일지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는 얘기였다. 우리는 정확히 이런 식으로 진화했어야 마땅하다. 바로 그렇게 미리 장착된 것처럼 판에 박힌 방식으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고 체계화하게끔 진화했어야 했다.


움벨트Umwelt, 한 동물이 감각으로 인지한 세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개들은 색깔이 아니라 냄새로 그려진 우주에 산다. 벌들은 자외선으로 그려진 띠와 줄 패턴으로 꽃을 찾아간다. 이와 같은 움벨트가 인간에게도 있다. 생명의 세계에 대한 우리 특유의 감각이 바로 움벨트다. 생물의 체계적 질서를 감지하는 방식, 처음부터 내장돼 있으며 판에 박힌 방식으로 세계를 지각하게 하는 그것. 모두 똑같은 움벨트를 갖고 있으니 모든 문화권에서 똑같은 자연의 질서를 알아보고 똑같은 종류의 분류학을 구축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된다.


분류학은 철저한 이성에서 태어나 명쾌한 실험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일반적인 과학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움벨트에서 받은 충동으로 태고부터 해왔던 일에서 파생된 과학이었다. 분류학의 아버지 칼 린나이우스가 천부적인 자연 체계 수립이 가능했던 것도 타고난 움벨트 감각이었다. 움벨트는 단순히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할 맥락이다. 다윈도 알았고 린나이우스도 알았고, 나무 그늘에서 꽃을 모으고 풀밭에서 개미와 벌레를 따라다니는 아이들도 모두 알았던 그것, 바로 움벨트와 그것이 드러내는 자연의 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자연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과학자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한 뒤 GPT에게 꽃 이름을 물어보는 정도로 자연과의 교감을 대체한다. 우리에겐 이미 물고기는 없고 생선만 존재한다. 오늘날 생명의 분류는 전문가들만 아는 난해하고 고립된 분야가 되었다. 우리가 치를 대가는 생각보다 클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 중 가장 큰 것, 바로 야생의 자연 자체를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는데, 우리는 생명과 너무 심하게 단절된 탓에 그에 대해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생명의 세계는 우리와 너무 멀어졌고 너무나 무관해 보인다. 


우리는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왔을까? 이 책은 이 질문들에 답하고자 하는 저자의 시도다. 이 책은 물고기가 존재하는 않는 이상한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다놓은 과학의 여정을 따라간다. 분류학이라는 과학의 초창기, 온갖 대륙에서 온갖 생물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인류가 생명의 세계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던 시절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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