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청대학술개론] 망국의 학술을 위한 변론2025-09-08 21:25
작성자

망국의 학술을 위한 변론

에레혼

청대淸代를 향한 현대의 시선에는 두 겹의 부정적 시선이 공존한다. 첫 번째는 청나라가 중국 전통시기의 끝머리라는 인식이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의 침탈과 내부의 혼란 속에서 무너져 내린 청조의 역사는, 20세기 초엽의 중국 지식인들의 '액받이' 역할을 했다. "천하가 망하고 흥하는 데에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고염무의 주장은, 본래 의도와는 무관하게 왕조 시대의 몰락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청대 지식인 사회 전체의 무능을 질타하는 언술처럼 변모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청대의 학술은 중국 전통 시기와 운명을 같이한, 무기력한 지성의 표상으로 간주되었다.

두 번째 부정적 평가는 해당 시기가 고증학의 시대, 오늘날의 관점에서 속칭 '노잼의 시대'였다는 주홍글씨이다. 고증학은 자구字句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다른 사료와 문헌으로부터 증거를 찾는 데에 골몰한다. 이런 특징 때문인지 고증학은 독자적 철학 체계나 거대한 세계관을 제시하지 못하고 '이를 시대 정신이라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 의문을 낳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격하에는, 고증학의 학문적 사명감이 실제로는 문자옥文字獄을 피하기 위한 지식인들의 도피처였다는 의구심이 더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중의 굴레 속에서 청대 학술은 쇠락의 증거 혹은 전공자를 위한 영역으로 자리한다. 하지만 고증학을 지루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글자 놀음으로만 치부하는 과정은 청학淸學의 본질과 시대적 필연성을 간과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양계초는 『청대학술개론』을 통해 청조 말엽 그리고 중화민국 초기에 팽배했던 청대에 대한 통념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는 책의 서두에서 이전 자신의 저술을 인용하며, 청조 200년을 중국의 '문예부흥시대'라 칭하고 그 지적 성취를 통해 중국 사상계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엿보았다고 선언한다.(본문 6) 이는 청대 학술을 망국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시류에 대한 반론이다. 양계초에게 청학은 쇠퇴가 아니라 재생이었으며, 그 핵심 동력은 '복고로써 해방을 삼는 것(以復古爲解放)'이라는 역설적 구호에 응축되어 있었다.

『청대학술개론』에서 청학의 전개 과정은 단순한 학파의 계승이 아닌, 청조 이전 시대의 학문이 구가하는 권위를 타파하고 사상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투쟁사로 묘사된다. 양계초는 저서에서 네 단계의 학술적 해방을 말한다.


첫째 단계는 송대로 돌아가 왕학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당대로 돌아가 정주학程朱學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전한前漢으로 돌아가 허신과 정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넷째 단계는 선진先秦 옛날로 돌아가 모든 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일단 선진으로 돌아가고 나면 공자와 맹자로부터 해방되지 않고서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해방의 효과를 두드러지게 나타낼 있었던 까닭은 과학적 연구정신으로 그것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현재 청학은 확실히 쇠퇴하였다. "사시四時 운행하며 성공한 자는 물러간다." 그러한 쇠퇴는 필연적인 기세이며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니 아파하고 애석해하며 연연해할 필요가 없다. 오직 이러한 연구정신을 다른 방면으로 전향하면 청학은 망해도 망하지 않은 것이 된다. (34-35)


, 양계초가 규정하는 청학의 가치 체계에서 복고는 과거로의 수구적 퇴행이 아니라, 후대에 덧씌워진 모든 부연설명을 걷어내기 위한 급진적인 방법론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 그토록 절실했는가? 양계초는 명대 말기의 학문 경향이 곧 만악의 근원이었음을 설파한다.

 

명대 말기 '광선狂禪' 일파가 "길에 가득찬 사람이 모두 성인이다", "·여자·재물·노여움은 깨달음의 길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니 도덕의 타락이 극에 달하였다. (중략) 그러므로 명말 이학의 폐해는 마치 유럽 중세기 암흑시대의 경교景敎 흡사하였다. 그러한 현상이 극도에 달하면 사람들의 사고력과 판단력은 모두 마비되어 쓰지 못하게 되니 독립과 창조의 정신은 사라지고 침식되어 완전히 소모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일반적으로 인류가 '학문을 하고 싶은 욕망' 갖는 것은 천성이다. '학문적 기아 현상' 이처럼 극도에 이르게 되면, 어찌 반동이 일어나지 않을 있겠는가? (38-39)


이는 고증학이 실존하는 문헌과 문물만을 근거로 삼아서 엄밀한 학술적 태도를 고집한 데에는 명말 학술계의 지적 타락이 한 몫을 했다는 설명이다. 송명 이학, 그중에서도 특히 명대의 양명학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어떠한 근거도 없는 주장'을 내면의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심지어 그러한 논의는 기존 학술 체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까지 동반했다. 청대 지식인들이 주관적 '주의主意''유심唯心' 대신 객관적 '주지主智''유물唯物', '명증冥證' 대신 '실험實驗'을 택해야만 했던(36)것은 사상사적 맥락 속에서 이뤄진 부득이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러한 청학의 선택은 객관성의 담보라는 수확과 대비적으로, '재미없음' 내지는 생동감의 결여라는 부정적 결과물로 이어졌다. 천핑위안 교수는 자신의 책 『명청산문강의』에서 고염무의 글을 평하며 '학자의 글'이라 정의하는데, 이러한 시각은 청대 지식인 전반에 대한 평가로 갈음해도 무방하다.

 

고염무는 일차적으로 대학자이고, 시인과 문장가는 부차적입니다. 그의 시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고, 여기에서는 그의 산문에 대해서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형적인 '학자의 '이라는 측면에서 고염무의 글은 나름의 독특한 매력이 있는데, 서사와 서정이 아니라 의론에서 탁월합니다. 황종희와 비교해보면 공통적으로 '힉자의 '이지만 고염무의 글이 더욱 소박하고 진중하며, 타고난 재능의 느낌은 다소 적지만 문학적 수식을 추구하지 않되 글을 통해 배움을 넓히고 화려함 대신 실질적인 부분을 추구했다는 점을 있습니다. (천핑위안의 , 299-300)


천핑위안은 자신의 저서에서 명대 지식인의 글이 '문사文士'의 문장을 대표하는 반면 청대 지식인의 글이 '학자學者'의 면모를 발휘한 문장이라 평가한다. 이러한 명·청대의 변화 양상은 단순히 글쓰기 스타일의 변모를 넘어, 지식인의 자기 정체성과 학문적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문사가 학문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글쓴이가 자신의 감성을 온전히 발현하는 일과 문장의 심미적 쾌감에 추구에 있다. 이와 달리 학자는 객관적 증거에 기반한 논증의 아름다움, 학술적 아름다움을 쫓는다.

서두의 논의로 돌아가 보자. 청대 학술은 과연노잼일 뿐인가? 양계초라면 이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청대 이전의 지적 광기를 바로잡고 학술의 기본을 바로 세우려면 청학이 추구하는 바는필수불가결한 따분함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고. 그의 시선은 청대라는 시대를 넘어, ‘학술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을 향해있다. 양계초에게 한 시대의 학술을 평가하는 기준은 '다음 시대를 위해 얼마나 충실하게 지적 공백을 메우고 무너진 토대를 복구했는가' 하는 물음에 담겨있다. 이러한 기준 아래 양계초는 청학의 복고적 방법론을 기존의 가치로부터 얽메이는 것을 피하기 위한 '해방의 학술적 방법론'으로 인식하였다.

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청대학술개론』의 한국어판 제목인 『중국 근대의 지식인』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곱씹어보고자 한다. 번역자는 왜 책의 제목을 이렇게 지었는지에 대해서 명쾌하게 짚어내지 않는다. 독자들은 양계초의 '학술사' 기획이 유럽 근대 이후의 지성사 재편 작업과 유사하다는 점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심지어는 이 한국어판 제목이 의미하는 '근대'가 가리키는 바 역시 모호하다. '근대'란 『청대학술개론』이 서술 대상으로 담은 청대인지, 아니면 양계초가 몸담았던 19세기 말에서 20기 초엽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역자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중의적 혼란이 양계초의 의도를 꿰뚫었다고 생각한다. 이 제목(『중국 근대의 지식인』)의 가치는 청대 전반을 쇠미가 아닌 재생의 시대로 보았던 저자의 관점을 반영하는 동시에 청말민초 일부 지식인들이 시도했던 '청대 재규정'이라는 행위 자체를 '근대'의 출발점으로 명명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 『중국 근대의 지식인』이라는 제목은 서술 주체(양계초)와 서술 대상(청대 학자)를 중첩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청학의 '과학적 연구 정신'에서 근대의 맹아를 발견한 양계초 본인이야말로, 그들이 마련한 토대 위에서 새로운 중국을 열어야 했던 '근대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중국 근대의 지식인』을 읽는 것은 청대 학술사를 익히는 것을 넘어, 급변기의 지식인이 어떻게 과거를 재해석하여 미래를 창조하려 했는지를 목격하는 행위가 된다. 물론 양계초가 청학의 따분함 속에서 근대의 가능성을 길어 올린 시도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문제는 독자의 몫이겠지만 말이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